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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씨부인전(4)

산마루금 2013. 3. 14. 09:36

                       4

 


 “네가 방금 한 말이 하나도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방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사를 노려보았다. 일전에 방진이 한양에서 절친한 벗이며, 영의정인 동고 이준경

이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던 청년 이순신과 그의 주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파악해

보라고 하명한 적이 있었다.   


 “대감마님, 소인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여쭙겠습니까?” 집사는 몇 번이

고 방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 이순신이라는 청년이 그리 걸출한 인물인 줄 몰랐구나. 그래, 수고하였다. 추

후로도 그 청년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접하거든 즉시 나에게 고하거라.” 방진은

집사의 말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한양에서 몰락한 양반이 어쩔 수 없이 처가가 있는 아산에 내려와 사는 별 볼일 없

는 가문으로 치부했던 자신의 불찰이 하마터면 큰 실수로 이어질 뻔 했다는 생각에

이르자 방진은 이준경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준경이 조선의 일인지하만인지상다운 안목을 가지고 있구나. 조선 팔도에

많고 많은 가문의 자제 중에 하필이면 가까이 살고 있는 그 청년이란 말인가? 그

청년이 한양에서 태어나 아산으로 내려온 것은 아마도 우리 딸아이와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게 준수하고 문무에 뛰어난 청년이 가까이 사는 것

도 모르고 지냈다니 과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맞는구나.


 그렇다면 서둘러 다른 가문에서 그 청년을 사윗감으로 점찍기 전에 혼사를 공식

적으로 진행해야 겠어. 그러나 그 청년의 부친 이정이라는 사람과 겨우 일면식이

있을 뿐인데 내가 불쑥 찾아가 사돈 맺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매파를 보내 그

집 의사를 타진해 보자니 낯간지러운 일이니 이 일을 어쩐다?’ 방진은 연신 곰방대

를 재떨이에 두드렸다. 방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해보는 거야. 이순신을 나에게 적극 추천한 영의정 이준경을 앞세

워 중매를 서도록 해보는 거야. 그러면 틀림없이 성사될 수 있겠지. 흐흐흐흐......’

방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방진은 즉시 초대장을 써서 집사

에게 주고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이준경이 처음에 이순신이라는 청년을 데릴사윗감으로 천거했을 때 탐탁지 않았

지만 그동안 자신이 알아본 내용과 집사가 파악하여 고한 내용이 일치하고 나름대

로 청년 이순신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상당히 수집하여 여러모로 분석도 해

보았다.


 훤칠한 풍채에 마을 청장년들도 모두 청년 이순신을 따르며 존경하고, 심지어 백

암 고을뿐만 아니라 근동에서도 청년 이순신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

다. 서당을 열어 마을 청장년들을 가르치고 시간이 나면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힘들고 억울한 일을 처리해 주기도 하며, 형제들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고 또한 효

자이며 마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겸손한 청년들로 평판이 좋았다.


 “방진이 이제야 그 청년의 진가를 알아보았나 보구나. 하하하하......, 벗에게서 초

대장을 받았으니 내 모른 체할 수야 없지. 마침 요즘 조정에 특별한 일도 없으니 내

친히 아산으로 내려가 보지. 험-.” 이준경은 방진의 편지를 받고 기분이 좋았다. 자

신에게 과년한 여식이 있다면 청년 이순신을 사위로 삼고 싶었다. 오랜 벗, 방진의

마음이 움직였으니 머지않아 상주방씨와 덕수이씨 가문에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

고 확신하였다. 한 나라의 재상이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방으로 행차하게 되면 지방관아의 수령들이 떼로 몰려와 뇌물을 안기

고 아부를 하며 한양으로 갈 수 있도록 요청하는 바람에 이준경은 노복(奴僕) 한 명

만 데리고 아산으로 떠났다. 늦봄이라 날씨도 화창하고 만산에 녹음이 점점 짙어가

고 있었다. 이준경이 아산에 내려와 방진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주막에 들러 청년

이순신에 대한 평판을 들어 보기로 하였다.


 “이보오! 주모, 여기 국밥하고 탁배기 좀 주시구려.” 영의정 이준경이 아무리 자

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하였지만 선골(仙骨)에서 풍기는 인상은 감출 수 없었다. 주모

는 예사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주막에

서 삼삼오오 탁주를 마시던 사내들이 이준경을 훔쳐보며 자기들 끼리 귓속말로 수

군거리기도 하였다. 국밥을 들고 탁배기로 요기를 끝낸 이준경이 주모를 불렀다.


 “나으리, 쇤네에게 무슨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 지유?” 주모는 두 손을 비벼

가며 연신 고개를 굽실거렸다.
 “주모, 혹시 백암리에 사는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시었소?”


 “하이고, 이 근동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모르면 왜놈 첩자지유. 선풍도골에

학식은 공자와 맹자님을 합쳐 놓았으며, 인품은 백암뿐만 아니라 아산 고을에서도

칭찬이 자자합니다유. 그뿐만 아니라 그분 형제들 또한 평생 땅만 파먹고 사는 무

지렁이 촌것들에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게 해주셨읍죠. 쇤네가 딸이 있으면 사위

로 삼으련만 호호호호호......” 주모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이준경의 눈치를 살폈다.


 “주모, 여기 탁배기 한잔 하고 안주도 괜찮은 거로 좀 주시구려.”
 “하이고, 예예. 나으리 분부대로 얼른 내오겠습니다유. 호호호호호......” 주모가

퉁퉁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음,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해. 비록 몇 년의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그 청년,

아니 여해는 틀림없이 크게 될 인물이야. 방진이 만약 여해를 사위로 얻으면 대대

손손 가문에 큰 영광이 있을 것이야. 내 이번에는 반드시 두 집안 간에 인연을 맺어

줘야겠어. 방진이 비록 전라도 보성지방 군수를 지냈지만 결코 군수 직분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야. 방진이 조선 최고의 명궁이며 그 휘하에 많은 청년들이 있는데 여

해를 데릴사위로 얻어서 잘만 조련한다면 장차 이 조선을 구할 인물이 될 수 있을

거야. 흠흠-’ 이준경은 탁주잔을 순식간에 비우고 뱀골로 향했다.

 

 “얘야, 네 나이로 봐서 너도 이제 장가를 들어야 할 텐데. 어디 마땅한 사람이라

도 있는 게니?” 변씨(卞氏) 부인은 두 형들이 이미 장가를 들어 살림을 났지만 장성

한 나이임에도 공부에만 매달리는 셋째 아들 순신이 안쓰러웠다. 어려서부터 남달

리 활달하고 총기가 맑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들었으며, 자존심이 세고 불의

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아들이었다. 위로 두 형이 있지만 셋째만큼 강단과 포

용력이 부족했다.


 슬하에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둔 변씨지만 마음에는 셋째 아들이 언젠가는 가문을

일으키고 장차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일 인물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순신

의 아버지도 네 아들 중 셋째인 순신을 가장 총애하면서도 아들들 간에 불화가 일

까봐 겉으로는 함구하고 있었다. 한양 마르내골에 있었다면 벌써 한양에서 내로라

하는 가문의 규수를 맞아 장가를 보냈을 터였지만 가세가 받쳐주지 못하는 처지라

이정의 마음은 아팠다.


 “어머니, 소자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장가는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음

에 둔 규수는 아직 없습니다. 어딘가에 인연이 있겠지요. 다만 그 시기가 아직 도래

하지않아 인연이 이어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짚신도 다 짝이 있다고 하니 언젠가

나타날 겁니다.” 청년 이순신은 어머니 변씨에게 자신의 뜻을 내비추면서 한편으

로 방진의 무남독녀 연꽃아씨를 떠올렸다.


 “우리 가문이 비록 예전 같지는 못하지만 너 하나 장가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이 애비도 네가 형들처럼 어서 짝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어험-” 아

버지 이정은 헛기침을 하며 마을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셋째아들이 세월

만 허비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였다. 이정은 몇 해 전부터 과거를 보라고 하였

지만 청년 순신은 어쩐 일인지 자꾸만 미루기만 하였다. 물론 가문에서 과거급제

를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양의 내로라하는 가문이나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가문에서 꾸준히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는 터여서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가문에서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과거는 한번 시험에 붙었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 서당에서

유학의 초보적인 지식을 배우고 십 오륙 세 이전에 한양은 사학(四學)에서 지방은

교에서 공부하여 몇 년 뒤에 과거의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얻게 된다.


 과거의 시험절차를 살펴보면, 먼저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크게 구별되었다. 소과

는 다시 초시와 복시의 2단계로 대과(大科)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나뉘어 있

었다. 따라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던 식년시(式年試)를 통과하여 다섯 단계를

모두 거쳐야 하기 때문에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 가족이 총력전을 펼쳐야 과거급제생 한명이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고된 일이었

다. 장기적으로 상당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청년 이순신은 현재 처한 집안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과거 시험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고 책을 지니고 과거장에 들어가거나 시험문제를 미리 알아내는 등, 온

갖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있음도 익히 알고 있었다. 뇌물과 정실(情實),

문벌의 고하(高下),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는 일 또한 비일비재

하였다.

 

 이 같은 현실에 청년 이순신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수재라 하

더라도 문벌의 배경이 없거나 경제적 뒷받침이 미미할 경우 과거에서 장원급제하

여 입신양명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 하였다.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정쟁(政爭)이 끊일 날이 없었다. 암담한 현실 속에

서 한양에서 지방 아산으로 내려온 것 자체가 청년 이순신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

이었다. 한양에서 지방으로의 전출은 그만큼 출세와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

하였다. 아버지 이정 역시 아들들의 출세를 위해서는 지방 보다 당연히 한양에 거

주하는 일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고, 동고 이 사람아, 미리 연통이나 놓지 않고서? 이리 그림자처럼 내 집에

들어오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하 하하하......” 남자하인 한 사람만 대동한

채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걸터앉을 무렵 뱀골 방진의 집에 도착한 영의정 이준

경을 보고 방진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그간 격조했으이. 잘 지내셨는가?”
 “잘이 뭔가. 내 일전에 한양 다녀와서 늘 마음이 편치 못했네. 내 몰골을 보시게

나. 몇 날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네. 못 먹고 못 자서 내 몰골이 말이 아닐세.

이 광대뼈 튀어나온 것 좀 보시게." 방진이 광대패 흉내를 내며 엄살을 떨었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 하인들이 키득거렸다.


 “아니, 천하 태평한 자네가 왜 마음이 편치 못했단 말인가?” 이준경이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였다. 방진이 당연히 자신에게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

제를 사윗감으로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가 아산에 거주하는 청년 이순신을 소개한

데 서운한 감정을 지우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다.


 방진은 호들갑을 떨며 부인 홍씨에게 속히 주안상을 보라고 하고 하인들에게는 

한양에서 영의정 이준경이 자신의 집에 왔다는 이야기를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

록 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비밀은 아무리 집안 단속을 하여도 새어

나가는 법이어서 금방 뱀골과 근동에 영의정 이준경이 방진의 집을 찾았다는 소문

이 삽시간에 펴지고 말았다. 관아에서 소문을 듣고 현령이 방진의 집으로 달려오기

도 하고 아산현에서 방귀 좀 뀌는 자들이 이준경을 만나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이준경은 지방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시찰하기 위하여 지나가는 길에 오랜 벗인

방진 집에 들렀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몇몇 눈치 빠른 벼슬아치들은 이준경이 방진

의 집에 온 사실을 알고 방진에게 청탁을 넣어 이준경을 만나보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이준경은 그들에게 자신이 아산에 왔다는 사실을 소문 내지 말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지방의 토호인 방진을 찾았다는 소문은 뱀골뿐만 아니

라 근동마을을 들썩거리게 했다.


 현령과 아전들은 무슨 일로 영의정이 방진의 집을 찾았는지 몹시 궁금해 하였지

만 이유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하였다. 혹시라도 지방 시찰을 돌다 자신들의 과오

가 들통 나 불령이 떨어질까 좌불안석이었다. 방진의 처는 산해진미를 상다리가

내려앉을 정도로 차려서 사랑채로 내왔다. 하인들은 집 밖에서 자신들의 주인인

방진이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영의정의 벗이라는 사실을 몰려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였다.


 “자자, 동고, 우선 내 술이나 먼저 받으시게. 이 누추한 곳 까지 와줘서 정말로

고맙네. 내 집에서 며칠 푹 쉬다가 가세.” 방진이 금잔에 미주(美酒)를 철철 넘치도

록 따랐다. 곧 이어 방진의 여식 연꽃아씨가 사랑채로 들었다. 분홍색 비단 치마와

연두색 저고리에 곱게 단장한 연꽃아씨를 바라보는 이준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야, 영의정 이준경 대감이시다. 인사올리고 술 한 잔 따르거라.” 방진이 얼굴

에 희색이 만면하여 연꽃아씨를 이준경에 소개하였다. 물론 연꽃아씨가 어릴 때

이준경이 잠시 본적이 있었지만 혼기를 앞둔 연꽃아씨의 절을 받자 입이 저절로 벌

어졌다. '시골규수가 예뻐야 얼마나 예쁠까?'하고 과소평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

다.


 “오오, 과연, 과연 자네는 복이 많은 사람일세. 경국지색의 여식을 두었으니 이

조선 천지에 아들 가진 부모들이 어찌 가만히 있으리. 과연, 과연 달나라에서 하강

한 항아가 틀림없으이. 내가 장가 안 간 자식이 있으면 당장 자네에게 청혼을 했을

걸세. 허허 허허허......” 이준경은 금잔에 술을 따르는 연꽃아씨를 보며 침이 마르

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올해 몇인고?” 이준경이 연꽃아씨가 따른 잔을 들며 물었다. 
 “소녀, 올해로 열아홉입니다.“ 연꽃아씨가 부끄러워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기분이 붕 뜬 방진은 연신 이준경에게 술을 권하며 기분이 좋아 히죽거렸다. 연꽃

아씨가 물러가자 본격적인 혼사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자네와 내가 이정의 집에 찾아가면 무척 놀랄 거야. 그러니 사람을 시켜 이정을

이리 초빙하시는 게 어떻겠나?” 이준경이 묘안을 내놓았다.
 “동고, 무슨 명목으로 이정을 내 집에 초대해야 하나?” 방진이 곤란한 표정을 지

었다. 이전부터 이정과 터놓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어서 무슨 명분을 내세워 이정을

 초대할지 난감하였다.


 “허허 허허허, 걱정하지 마시게. 내 친필을 써 줄 테니 사람을 시켜 이 밤으로 보

내시게. 아마 내 편지를 받는 즉시 바람같이 달려올 걸세.” 이준경이 써준 서신을

들고 집사가 백암으로 달려갔다.


 “동고, 그 양반이 오면 내가 뭐라고 해야 하나? 다짜고짜 ‘우리 사돈 맺읍시다’라

고 말을 꺼내야 하나?” 방진은 이준경에게 좋은 묘책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도 내

심 불안하였다. 새 술병이 두세 번 더 사랑채로 들었을 때 집사가 사랑채로 들어왔

다.


 “뭐라고, 자네가 이 밤에 그 분을 직접 모시고 왔다고? 허허, 큰 결례를 했어. 내

일 아침에 뵙고 싶었는데 이 밤에 모시고 오다니......” 방진이 집사를 나무라자 이

준경은 빙그레 웃었다.


 “내 뭐라고 했나? 내 편지를 받는 즉시 달려올 거라 하지 않았는가? 하하하

하......”
 “어서, 그분을 이리 모시거라. 어서.” 방진이 부리나케 일어나 이정을 맞을 채비

를 하였다. 곧이어 집사의 안내로 이순신의 부친 이정이 방진의 사랑채로 들었다.


 “만인지상이신 영의정 대감께서 어인일로 아산에 오셨습니까? 또 이 사람까지

불러주시고 감읍할 따름입니다. 방대감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반쯤 허리를 굽혀 서로 맞절을 하였다. 이준경이 아무리 영의정이라고 하나 이정

또한 대대로 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한 선대를 둔 양반이었다. 이정의 아버지 이

백록과는 친분이 있는 터라 이준경도 이정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다하여 이정을

맞이했다. 서로의 인사가 끝나자 잠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사람이 감히 동고 대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니요? 제

가 제갈량도 아니거늘 당치도 않습니다. 낙향하여 세월을 낚는 사람에게 전혀 어

울리지 않습니다.” 이정은 이준경이 보낸 서신에 삼고초려라는 네 글자를 보고 깜

짝 놀랐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무조건 뱀골로 달려오긴 하였지만 그 깊은 뜻을

몰랐다. 이준경이 삼고초려 할 만큼 보고자 하는 사람은 이정의 셋째아들 이순신

이었다.


 이정은 이준경이 자신을 놀리는 말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일말의 기대감도 가

지고 있었다. 부친과 이준경 대감이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차

마 지체 높은 영의정이 자신에게 벼슬을 주려고 일부러 아산까지 왔을 리는 만무

했다.


 “여해는 잘 있겠지요?” 여해라는 말에 이정은 눈이 번적 떠졌다.
 “대감께서 제 셋째 자식을 어떻게?” 이준경은 청년 이순신이 한양에 있을 때 서

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던 일을 우연히 본 사실을 말하면서 방진의 무남독녀의

배필로 이순신을 점찍어 중매를 서기 위하여 한양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오오, 대감께서 제 자식을 그리 잘 보셨다니 덕수이씨 가문에 큰 영광입니다.

나라의 재상께서 중매를 서는 일에 이 사람이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방대감

이 좋다면 내 자식과의 혼인은 절대 찬성입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이정은 흐

뭇해했다. 방진이라면 아산에서 제일가는 부호이며, 무예도 출중하여 따르는 무

리가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정 역시 지금은 벼슬이 없어 낙향하여 처가 주변에 살고 있지만 만약 조정에

출사하였다면 얼마든지 방진에게 먼저 혼사를 청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의 처지에서 가세는 방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른께서 그리 흔쾌히 말씀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아드님이 인품뿐만 아니라

문무에도 출중하다 들었습니다. 어르신께서 허락하시어 아드님과 제 여식이 혼인

을 맺도록 해주신다면 우리 상주방씨 가문에 큰 영광입니다.” 방진은 이정에게 단

도직입적으로 딸의 혼사를 꺼냈다. 방진은 정중하게 이정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따랐다.


 방진의 가문 역시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이었지만 조정에 출사할 만큼 높은 벼슬

을 하지 못하였다. 증조부 방홍지는 평창군수를 지냈으며, 조부 방중규는 영동현

감을 지냈다. 방진 자신은 조상들 보다 더 크게 출세하지 못하고 전라도 지역 보성

군수에 머문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슬하에 딸 하나 밖에 없는 처

지로서 특출한 데릴사윗감을 골라 딸의 앞날을 보장해 주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사 및 상주방씨 가문도 아울러 빛내줄 전도유망한 청년을 원했다.


 그런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방진에게 이준경이 미미한 가문의 이순신을 거론했

을 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러 버렸지만 이준경의 강력한 권고와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은 청년 이순신은 문약한 사대부가의 자제와 달랐다. 방진은 여러 사

람의 이야기와 이미 딸이 청년 이순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욕

심을 버리고 청년 이순신을 데릴사위로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방진의 말에 처음에

크게 환영하던 이정은 데릴사위라는 조건에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여해는 장차 이 나라에 귀하게 쓰일 동량입니다. 사람에게는 태

어난 장소와 시기에 따라 간웅이 되기도 하고, 건곤일척을 도모하는 호걸이 되기

도 합니다. 아드님은 반드시 이 나라 조선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바질 때 구국의 기

둥이 될 자질을 타도 났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한양에서 몸소 이곳까지 내려왔

겠소? 두 가문이 인연이 맺어진다면 두 가문 모두 큰 영광이 있을 것이오. 내 말이

틀림없을게요.” 이준경은 손수 이정에게 술을 따르며 은근한 시선을 주었다. 방진

역시 이준경의 말을 예언처럼 믿고 있었다.


 “두 분 대감께서 내 자식을 그리 보시니 내 할 말은 없소이다.  이 일은 인륜지대

사인 만큼 집에 가서 안 사람과 제 자식을 불러 의논해보고 사흘내로 기별을 넣겠

습니다.” 이정은 늦은 밤 방진의 대저택을 나서면서 자다가 홍두깨에 맞은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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