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금
방씨부인전(2) 본문
본 소설은 덕수이씨 가문에서 태어나신 聖雄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상주방씨
가문의 연꽃아씨를 만나 혼인하고 장인 方震(방진)의 권고로 文科에서 武科로 전향하
여 과거에 합격하는 기간 동안의 행적을 소설화한 작품입니다. 많은 愛讀 바랍니다.
본 소설은 2012 鶴山文學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方氏夫人傳
- 저자 : 여강 최재효
2
천장강대임어시인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 필선고기심지(必先苦其心志)하며, 노기
근골(勞其筋骨)하며, 아기체부(餓其體膚)한다.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
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그 근골을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한다.’ 공핍기신(空乏其身)하야 행불란기소위(行拂亂其所爲)하나니 소이동
심인성(所以動心忍性)하야 증익기소불능(曾益其所不能)이니라.‘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
을 참게 하여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백암 마을
에 초저녁부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한양에서 이사 온 이씨네 집에서 흘러나오는 글 읽는 소리는 마을의 분위기를 바
꿔 놓았다. 한 평생 땅만 파고 살던 사람들에게 글 읽는 소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
게 하였다. 소 워낭 소리나 초저녁에 개 짖는 소리 혹은 새벽을 알리는 닭 우는 소
리에 익숙해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이씨네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신선하게 느
껴지면서도 어딘가 농사만 짓는 동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청년을
비롯하여 부모형제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였다.
마을 대소사에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는 빠짐없이 참석하였고 형제들도 마을
청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양에서
내려왔다고 거드름이나 피우는 잔반(殘班)이 아니었다. 물론 청년 외할아버지 댁의
영향력이 마을에 작용하였지만 마을 사람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전적으로 청년과
부모형제의 노력 덕분이었다. 네 형제 중 세 번째인 청년의 역할은 마을의 남녀노
소의 마음을 얻고 있었다. 집안에 마을 소년들을 불러 모아 천자문이나 소학을 가
르치며 몽매한 농촌을 눈 뜨게 하였다.
청년은 두 형과 아우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다. 떡 벌어진 어깨와 짙은 눈썹, 붉
은 입술, 하얀 얼굴은 어쩌다 마을 처녀들과 마주치면 대부분 처녀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청년의 훤칠하고 고매한 성품은 백암뿐만
아니라 근동(近洞)에 소문이 났다. 특히 마을에 혼기가 찬 여식을 둔 부모들은 이씨
네 자제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이 살던 마르내골에서 대대손손 살다 사정상 아산
으로 내려온 이정과 초계변씨는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다. 청년의 큰형은 얌전한 서
생의 전형으로 이름은 희신(羲臣)이며, 중형(仲兄)인 요신(堯臣) 역시 조용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로 늘 수불석권하였다. 청년의 아우 우신(禹臣)은 어릴 때부터 약골로
늘 어머니 변씨 속을 태웠다.
마르내골에서 살 때부터 우애가 깊은 네 형제가 서당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백
수나 다름없는 아버지 이정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네 아들들 보기가 민망했
다. 선조들이 피땀 흘려 이룩해 놓은 재물과 가문의 명성이 자신의 불출세(不出世)
로 시들어 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권문세가들이 한량
인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뿐더러 은근히 업신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
울 수 없었다.
또한 이웃들의 경조사에 모르는 체 할 수도 없어 그들의 생활수준에 맞는 하례에
도 상당한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자신의 본거지인 한양을 떠나 처가가 있는 아산
산간벽지로 생활 기반을 옮기는 일은 자존심이 남달리 강한 이정에게 참을 수 없
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정은 네 형제에게 가문의 미래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아산牙山에 칩거하다 시피하면서도 이정은 종종 한양을 오르내렸다. 그때 마다
이정은 네 형제 중 가장 신체가 단단하고 성품이 침착하며 범상한 기품을 지닌 청
년을 대동하였다. 아버지의 총애는 형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청년은
늘 겸손했다. 청년은 마르내골에 살 때부터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병정놀이를
즐기곤 하였는데, 그때 마다 대장 노릇을 하였다. 나이는 십세 중반이지만 아이들
의 놀이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병정놀이가 아니었다.
소년의 지휘 아래 병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상대편을 제압하는 등 실전
을 방불케 하였다. 만약 병졸 등이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병정놀이를 훼방
하는 어른이 있다면 소년은 가차 없이 겁박하거나 살의 가득한 눈초리로 쏘아보아
어른들도 감히 참견하지 못했다. 자연 마르내골 뿐만 아니라 남산골에서도 소년
이 대장으로 있는 병정놀이가 벌어지는 날이면 구경꾼들이 새카맣게 모여들곤 했
다.
한번은 청년이 한양에 다녀오다 늦은 밤 아산에 도착하여 백암리로 향하는데 동
네어귀에서 불량배들을 만났다. 불량배들은 청년이 한양에서 내려와 온 동네 처녀
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단단히 혼내 주려고 벼르고 있던 참
이었다. 대여섯 명의 장년들이 청년을 에워쌌다. 그러나 청년은 눈도 깜박하지 않
고 침착하게 사방을 주시하였다.
“어이, 이봐. 이 마을에 살러왔으면 토박이 형님들에게 먼저 인사가 있어야지.
이거 너무한 거 아녀? 그리고 마을 처자들 마음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면서? 오늘
은 우리가 자네 인사를 받아야 겠어.” 덩치가 깍짓동만한 사내가 청년에게 달려
들었다. 동시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거구가 나뒹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내가
나뒹굴자 이번에는 나머지 사내들이 우르르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청년이 공중으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나머지 사내들이 배를
움켜잡고 뒤로 자빠졌다. 청년의 일당백 무예와 기세에 눌린 마을 장정들은 비실
비실 거리며 도망가려고 하였다. 청년은 그들을 가로 막고 모두 땅바닥에 꿇어 앉
혔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자에게 청년이 이름과 나이를 묻고 악수를
청했다. 어차피 이들과 좋으나 싫으나 오랫동안 부딪히며 살아갈 이웃들이기 때
문이었다. 청년은 앉아있던 마을 장정들을 일어나게 했다.
“나를 여해라 불러주오. 내 이 마을에 놀러온 것이 아니고 뿌리를 내리려고 한
양에서 내려왔소.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도 가급적 마을 분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오래오래 살고자 하오. 나와 우리 가족들을 적대시 하지 마시오. 그대들이 어려움
에 처하면 우리가족 모두는 발 벗고 나서서 도울 것이오. 또한 우리 가족들이 곤란
에 처했을 때 역시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할거요. 앞으로 우리 동무로 잘 지냅시
다.”
청년과 마을 장정들 간에 한바탕 소동이 있고난 뒤로부터 마을 장정들이 청년을
찾아와 동무가 되기를 청했다. 청년은 마을에서 비슷한 나이또래 사이에서 고립
무원의 처지로 있다가 동무 둘을 얻으면서 차차 마을의 또래들의 중심에 서게 되
었다. 청년이 한양에서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을 모아놓고 훈장 노릇을 했던 경험
을 되살려 마을에 서당을 개설하였다.
마을 원로들은 땅을 파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무슨 공부냐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
는 반면 중장년층은 청년 여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청년은 외
가에서 도움을 받아 마을 한복판에 집을 짓고 밤에만 공부를 가르치는 서당을 열
었다. 처음에 마을 소년 서너 명이 출석하더니 차차 청년이 지도 방법이 소문이 나
면서 이웃 마을 소년들까지 몰려들어 마을은 밤늦게 까지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
게 울려 퍼졌다.
“아우야, 너 혼자 서당일 하기 어려울 것 같아 형들이 함께 하기로 했다.” 청년
의 큰형 희신과 둘째형 요신은 아우 혼자 마을 청소년들 가르치는 일이 무척 힘
들게 보여서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삼형제의 선행은 인근 마을뿐만 아니라 아산
에 널리 퍼지면서 공부를 하겠다는 몰려오는 청소년들로 북적였다. 서당의 수업
은 주로 가을부터 이듬해 봄 모내기 까지 이루어지는데 물론 수업료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추수가 끝나면 공부하는 청소년들은 볏섬이나 잡곡을 짊어지고 와
서 삼형제에게 수고비로 내놓기도 하였다. 청년이 논어와 맹자를 가르치고 큰형
희신이 천자문과 소학을 둘째형 요신이 동몽선습을 가르쳤다. 물론 청년의 두형
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훈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청년은 여전히
한양을 오가며 마르내골 벗들과 친분을 이어갔다.
추수를 마치자 뱀골의 토호 방씨 댁에서 데릴사윗감을 구한다는 소문에 청년의
마을뿐만 아니라 근동까지 퍼졌다. 상당한 재력가이며 전라도 보성군수까지 지낸
방진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출세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방진의 무
남독녀 연꽃아씨는 출중한 미색으로 아들을 가진 부모들은 누구나 한번쯤 방씨네
와 사돈을 맺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매파들이 쉴 새 없이 방진의 처 남양 홍씨를 만나 사윗감을 소개하였지만 방진과
방진의 처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매파들이 백암에도 다녀갔지만 청년의 집은 들
리지 않았다. 마을에서 제법 한다는 집안은 매파에게 거금을 쥐어주며 자신의 아들
이 방씨네 데릴사위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하였다. 청년의 어머니와 아버지
이정은 셋째 아들이 혼기가 찼음에도 장가들 생각은 않고 공부에만 매달려 가슴을
태웠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장가드는 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
겠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 진 다음에 장가들어도 충분합
니다.” 청년의 부모는 아들의 뜻이 확고 하자 더 이상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
다. 청년의 외조부 변수림(卞守琳) 공은 딸에게 청년을 방진의 사위로 들이라고 권유
할 정도였다. 일 년이 흘러도 이렇다 할 사윗감을 구하지 못한 방진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 거참, 내 여식이 그만하면 양귀비도 울고 갈 정도이고 나는 아산에서 제일가
는 부자이건만 어찌 변변한 사내가 나타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아산고을에는 내
여식의 배필감이 없다는 말인가? 어떤 녀석이든 내 딸의 배필감으로 낙점되면 호
의호식하며 평생 편안하게 살 텐데. 나 죽으면 그 많은 재산은 모두 사위 몫이 될
것이고 우리 두 늙은이는 죽어서 외손봉사나 받으면 될 것인데. 아산에 인재가 없
다면 어쩐다?’ 방진은 초저녁부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얘야, 너 혹시 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느냐? 있다면 이 애비한테 말해보
렴. 그동안 아산을 이 잡듯 뒤져보아도 그럴듯한 사윗감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니
면 이 애비가 조만간 한양에 올라가 사윗감을 알아보려고 한단다. 네 나이로 보아
이미 혼기가 꽉 찼으니 애비가 되어 그냥 있을 수 없구나.” 방진은 불콰한 얼굴로
꽃같이 자란 딸을 바라보았다. 누가 사위가 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사위가 될 남자
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복을 받는 사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귀하게 자란 딸을 남의 집에 시집보내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방진
은 딸의 장래와 자신들의 제사를 책임질 사위를 들이는 일이 훨씬 득이 된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연꽃아씨는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깊은 밤에 정화수를 떠놓고 지성
을 드리고 있었다. 연꽃 아씨는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지난해 설날 마을 공터에서
마을 청년들이 모여 윷놀이를 할 때 우연히 마주친 헌헌장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선랑(仙郞)은 백암에 살며 얼마 전 한양에서 내려오신 분이라고 하셨어. 변씨
가문의 외손자라고 하셨지. 하얀 피부, 훤칠한 키, 늠름한 기상, 침착해 보이는 성
품. 요즘은 근동의 소년들을 모아놓고 서당을 열고 있다고 하셨어. 천지신명께 그
분과 연분이 닿게 해달라고 지성을 드렸지만 무의미하게 세월만 지나가고 있어.
행여나 그분에게 어떤 인연이 생길까봐 지난 일 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지냈어. 이
제는 내가 상사병이라도 날 것 같아. 아버님에게 말씀드릴까. 아니야, 괜히 말씀드
렸다가 나를 부정하다고 생각하실 지도 몰라. 아아, 어쩌나......’ 연꽃 아씨는 입이
타들어가고 심장이 두근거려 얼굴이 그만 빨갛게 물들었다.
연꽃아씨는 아버지 방진에게 지금 당장 백암에 사는 청년을 지목하여 신랑감으
로 들이라고 간청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사랑채에서 나온 후에도 연꽃아씨는 화끈거리는 뺨을 물수건으로 식
혀야 했다.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게 백암고을 그 사내를 말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
팠다. 연꽃아씨는 몸종 아지를 불러 저녁나절에 외출할 차비를 하라고 했다. 연꽃
아씨는 어머니 홍씨에게 건넛마을에 사는 친한 벗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금방 해가 넘어가 어스름한 상태라 마을 사람들 시선을 피해 외출하기에 안성맞
춤이었다. 아지는 신이 나서 앞서가며 재잘거렸다. 연꽃아씨는 청년이 훈장으로
있는 서당을 가보고 싶었다. 지난해 설날 얼핏 한번 본 청년의 모습을 잊을 수 없
었다. 일 년이 넘도록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며 넋을 놓고 있다가 그
청년을 다른 가문의 규수에게 빼앗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방에 눈이 있어 연꽃
아씨가 서당에 간다하여도 운이 좋아 멀리서 청년의 모습을 보면 다행이지만 그
렇지 않을 경우 마음만 더욱 심란할 것 같았다.
“아씨, 백암에 누가 있어요? 아씨 친구는 다른 데 살잖아요. 그 마을에는 일가친
척 분도 안 계시는 걸로 아는데......” 아지는 연꽃 아씨의 눈치를 살폈다.
“아지야, 너만 알고 있어야해.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백암에
말이다. 백암에 임이 계시 단다.” 연꽃 아씨는 나직이 속삭이며 행여 누가 들었을
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지난해 청년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연꽃아씨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잠깐 주
고받은 시선이지만 청년의 강렬한 인상에 연꽃아씨는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변하
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머릿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그 누
구에게도 첫눈에 그런 야릇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는 연꽃아씨였다. 집으로 돌아온
연꽃아씨는 한지에 청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깊은 밤이 되면 거의 매일 연꽃아씨
는 그림을 펼쳐 놓고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어떤 날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연꽃
아씨의 꿈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아지가 등에 불을 붙이고 앞장서서 걷는데 어쩌다 같은 마을에 사는 총각이나 여
인네들을 만나면 모르는 척 하고 휙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은 한참 동안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웬만해서는 연꽃아씨가 밤에 바깥출입을 하는 경
우가 없었기 때문에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암으로
가는 들길은 협소하여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었다.
찬바람이 솔솔 부는 텅 빈 들녘에 허수아비가 두 소녀를 보고 양팔을 흔들면서 춤
을 추었다. 아지는 춤추는 허수아비를 가리키며 연꽃아씨에게 보라고 했다. 밀짚모
자를 쓴 채 다 낡은 하얀 저고리를 입은 허수아비의 모습이 너무 추워보였다. 풀잎
에 맺힌 차가운 이슬에 두 소녀의 발과 치맛자락이 촉촉이 젖고 말았다. 동녘 하늘
에 막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우측면은 누에가 갉아먹은 것처럼 이지러져 있었지만
은은한 달빛은 두 소녀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서당에는 추수가 끝난 무렵이라 근동의 청소년들이 꽤 모여들어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소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농촌의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초가집의 서당은 대략 이십 평쯤 되어 보이는데 어
른 키 높이에 창문이 세 개가 있어 창문이 열려있을 때는 밖에서도 서당 안의 모습
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달이 떠 있어서 어둑어둑한 서당 주변의 모습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연꽃아씨와 아지는 혹시 누가 볼까봐 버드나무 뒤에서 서당을 살펴보았다. 마침
공부하는 시각이라 서당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지는 등을 끄
고 서당에 가까이 접근하였다. 아지가 손짓을 하자 연꽃아씨는 살금살금 서당을 향
해 다가갔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연꽃아씨와 아지를 봤다면 큰 사단이 나고 말 것
이다. 남정네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서당에 여자의 발길이 이어져 부정을 탄다거나
불길한 징조가 있다거나 하는 별의별 이상한 말이 오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지는 혹시 마을사람들이 오가는지 망을 보고 연꽃아씨는 숨을 죽이며 서당으로
접근하여 창문을 통해 겨우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마을
소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사람은 연꽃아씨가 꿈에도 그리던 그 청년이 아니
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연꽃아씨는 얼른 버드나무 아래도 돌아와 훌쩍거렸다.
소년들을 가르치던 사람은 청년의 큰형 이희신이었다.
대개 초저녁에는 청년의 장형이 기초적인 학습을 시키고 늦은 시각에는 청년이
논어와 맹자를 가르쳤다. 연꽃아씨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냥 뱀골로 돌아가려
하였다. 아지가 간신히 눈물을 훔치며 새침하게 서있는 연꽃아씨를 달래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두 식경이 지나자 서당 안에서 마을 청소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기초학습 과목에 이어 중급 학습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볼 일을 다 본 학동들이 다시 서당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자 사방은 다시 고요
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아지가 먼저 서당에 살며시 다가가 안을 살펴보았다. 아지
가 연꽃아씨에게 달려오다 넘어지면서 빈 논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연꽃아
씨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아지가 논에서 나오기를 바랐다.
“아씨, 그분, 그분이 틀림없어요. 분명히 아씨가 말씀하시던 그 분이예요.” 아지
는 숨을 헐떡거리며 게거품을 물었다. 연꽃아씨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서당
을 향해 다가갔다. 희미한 촛불에 비친 훈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아, 선랑님, 선랑님......” 연꽃 아씨는 자신도 모르게 청년을 부르고 있었다.
그때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더니 연꽃아씨의 고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감격
해 하는 연꽃아씨의 수줍은 두 뺨 위로 수정보다 맑은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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