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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영화] 집은 검다

산마루금 2018. 3. 24. 14:36

1. 집은 검다

 

1960년대 이란 나환자촌을 찾아간 어느 시인의 시와 카메라가 던지는 모순의 기도 

당신은 그냥 외면해도 상관없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본심이다.

일그러진 얼굴들을 마주 하면 눈을 버릴 지도 모른다. 기분이 상할지도 모른다.

결코 바람이 우리를 그 곳으로 데려다 주기를 거부하고 싶은 괴로운 대면의 단편 다큐멘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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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은 검다(1962) : 포르그 파로흐저드

 = "추 醜"의 미학인가?  어울림의 용기인가? 

 

 

이 다큐를 보는 데는 용기가 아니라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소량의 이기적인 너무나도 이기적인 보는 자의 희생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고나서 당신이 가슴 한 켠을 쓸어내릴 수도, 괜히 피부를 끌어내릴 수도 없는 아주 적은 희생

다르게 말해 그 희생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더불어 어울릴 수 있는 부끄러움이다.

 

 

모든 영화는 고통을 담보로 한다.

할리우드의 공장이 고통을 해결의 하위요소 정도로 활용한다면

유럽예술 영화는 고통을 분절하거나 이음매 없는 한줄의 진지한 고민으로 남겨둔다.

어느 쪽이든 고통은 맞닥드리고 싶지 않은 대면이라는 절차를 통과해야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형식을 지닌다.

 

 

지금 소개해드리는 이 영화 "집은 검다" 는

직접적으로는 바로 이 대면이라는 지점에 대한 용기를, 간접적으로는 그 이후의 포용에 대해서 영상과 시로  질문하는  

이란의 1960년대 초반 나환자촌(한센병)으로 찾아간 시인의 시와 카메라로 만들어진 22분량 단편 다큐멘타리이다.

 

 

무성영화 이후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실제 얼굴의 눈과 귀와 코와 입 그리고 가끔은 눈물까지도 포함된 사실적인 형체와

동시에 그것들이 가지는 합산 이상의 이미지의 환영을 모순형용적인 떨림으로 관객이 느낀다면

적어도 그것은 간단히 슬픔이나 기쁨 따위의 감정 과잉으로 환산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적용되어야할 일반적인 사례가 무표정이 가지는 세상의 표상으로서의 얼굴이라는 기표이다.

이미 무수한 무표정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그것은 세상이라는 컨텍스트와 분리되어질 수 없음을

다른 감정이입을 요구하는 감정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형태로 전달한다.

 

 

무표정은 그 자체로 무기력한 삶의 근육의 멈춤이자 확장으로서 작용하여

그것을 대면하려는 이에게 극도의 패배심리와 염세주의 종국에는 고개돌림의 회피를 일으킨다.

하지만, 무표정은 극한의 분노보다 더한 자세로 화면 밖 관객의 개입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대개의 경우 그것은 즉각적인 동요가 아닌 쉽게 내디딜수 없는 고민의 좌석에 배정되는 체험이 된다.

무료든 혹은 유료든간에 자리에서의 이석은 금지된다. 영화는 도피에서 다시 이 곳으로 되돌아온다.

 

 

80년대초반 국내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었던 형이상학적인 미학 서적의 첫 문단에 흔히

주석으로 짧게 언급되는 "추 醜"의 미학성을 염두에 둔 실험적인 영상이 아닌

어떻게 닫힌 것을 열 것인가를 나지막하게 묻는 실천의 윤리학을 영화는 제시한다.

 

 

이란의 60년대 '여성(이 표현을 허락하시길)' 시인이라는 지위와

오직 이 작품 하나만을 남긴 그녀의 영화에 대한 지적 수준을 알 수 없지만

단편은 사운드와 화면, 카메라의 활용 등에서 여느 중견의 그것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도입부의 문장을 통한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고

일련의 나환자들의 얼굴을 추악함의 구경거리로 내던지는 오기 따위는 범하지 않으며

댓구를 이루는 교실 수업과 담벼락의 산책을 통한 주제의 반복 전달

종교와 교육과 식량 배급이라는 나환자촌에서의 정치성에의 주목

원근법을 이용한 비천한 삶의 등장 등을 영화는 서둘지 않고 차근히 짧은 시간에 올려놓는다.

 

 

영화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고백해 둘 것은

관객으로서 나는 희생도 용기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에게 뭉개진 그들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건 영화를 추천하려는 자의 태도는 아니다. 하지만, 용기나 희생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다.

 

 

 

감독이 첫 장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인의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여줄 때

그 거울의 실제 시선은 반사되어 관객에게 강요된다.

거울 옆에는 물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주전자가 있다.

물론 거울 속으로 점점 더 카메라는 밀착하고 반쪽 얼굴은 클로즈업이 된다.  

얼굴 - 거울 - 주전자의 부정이 아닌 은유의 단순한 배치의 변증법을 통해

영화는 관객의 시선이 정확히는 자리가 어디에 귀속되어야하는지 첫 장면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질의하고 있다.  

 

 

이제 카메라는 본격적으로 그들만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첫 장면의 여인 혼자만의 클로즈업에서 이어지는 화면에서는 다수 어린 학생들의 교실 장면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영화는 혼자와 다수를 오가면서 오히려 그들이 혼자든 집단이든 상관없이 소외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위 교실 장면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떠올려지는 것은

단지 공간과 어린 학생들이라는 소재적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다.

두 작품은 어떤 희망의 역설을 아이들에게서 발견하려는 듯

수업 중에 장난치는, 그리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고통과 모순되는 학습과 대답을 말하는 학생들에게서

관객이 스스로 뒤돌아봤을 때 도달해야할 자리를 슬며시 제시한다.

 

 

얼굴이 뭉개진 어린 학생들이 신에 대한 감사의 문구를 소리내어 읽고

학생들의 호기심에 찬 표정들 사이를 카메라가 지나갈 때

소리와 이미지는 겉으로 반목하지만 결코 신파적인 학대로 나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병에 걸린 어린 소년들의 카메라를 보는 시선은 관객에게 미/추의 경계에 대한 본능적 움추러듬을 묻는다. 

 

 

노년의 나병환자는 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토요일에서 평일로 거꾸로 요일을 말한다.

원근법의 소실점에서 걸어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이 장면은 영화 내에서 두 번 반복된다.

무기력으로 인해 완전히 소진되어버린 생기가 무의미한 되돌이표로서 작동될 때

관객의 위치는 소실점의 맨 끝짜리에 좌표가 된다.

남자에게 요일이 없듯이 관객에게는 그가 없다.

그는 영화 내내 등장하는 다른 나환자들의 몸짓을 대표하는 일종의 버려진 쓸모없는 신체이다.

 

 

 

남자의 왕복 걷기 사이로 창가에 놓여진 말라붙은 화분을 삽입시켜서 그와 죽어가는 꽃을 동일화시킨다.

이후 화분 옆에 같은 나환자 할머니가 등장하면 그녀 역시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암시한다.

 

 

1960년대 이란에서 나병은 신에게 저주받아 생긴 병이라 하여 별도의 치유없이 기도만을 강요받았다고한다.

신에게 기도를 하려해도 두 팔과 다리가 없어 제대로 엎드릴 수가 없는 자들의 기도란 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가?

 

영화는 교실을 지나 예배당에 도달하여 신에의 귀의가 아닌 질의를 반복하고 이어서

당시 의료진의 나병 치료 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나병이 전염병이 아님을 밝힌다.

치료받는 나환자들의 무표정은 아무런 삶에의 의지가 담겨져 있지 않다. 

 

 

 

이전까지 나환자들에게서 제거된 생의지를 보여주던 카메라는

갑자기 모성을 실제 나환자 여성과 길거리의 개와 강아지를 번갈아보여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그들만의 현실과 의지를 포착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봐야할 것은 산모의 뭉개진 손이 아니라 그녀의 젖을 물고있는 아기가 되어야한다. 

 

 

머리를 빗겨주는 나환자와 검은 비단결 머리 소녀의 장면에 이어서 카메라는 긴 머리 노년의 여성을 대비시키고

다시 나환자 간의 결혼식과 같은 축제의 흥겨움을, 배식 시간이 되어 급식을 타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노인 나환자의 목발을 가져가 장난감으로 사용하는 소년의 짖긏음을 연이어 화면 위에 올린다.

그들의 세상 안에서도 즐거움과 꾸밈과 장난의 존재함을 들추어냄으로서 관객의 인정은 동정 위에서 움직인다.

 

 

사선의 원근법 장면에 이어서 정면의 나무와 길로 만들어진 원근법의 다리 없는 나환자가 나타난다.

이전의 사선 속 남자와는 달리 이 남자는 열려진 문 밖으로, 정확히는 고정된 카메라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나가려고 한다.

마지막에 화면은 그의 몸으로 검게 되고, 관객은 그의 빈 다리 한쪽 알아볼 수 없다.

 

 

한 명의 검은 신체가 열려진 문을 통해 통과하려는 전 장면과는 달리

나환자촌 전체 사람이 행진을 하면서 나가려는 문은 그들 바로 앞에서 닫혀버린다.

문 앞에는 이란어로 나환자촌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문을 열려는 자도 문을 닫은 자도 정확히 보이지 않는 이 장면은 후반부 교실 장면에 삽입된다.

 

 

전반부 교실에 이어 후반부 마지막 시퀀스도 교실로 종결된다.

무표정한 교사는 아직 나병의 기운이 없는 소년에게 묻는다.

"보기 좋은 것 몇 개를 말해라"  - "달, 해, 꽃, 노는 시간"

다시 교사는 나병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소년에게 묻는다.

"보기 싫은 것 세 가지를 말해라" - "손, 발, 머리"

 

그리고 나병으로 완전히 머리가 없어진 늙은 얼굴의 소년에게

"집"이라는 단어로 떠오르는 문장을 만들라고 말한다.

소년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 영화 속 모든 이들의 시 詩로서 칠판에 써지는 문장은 "집은 검다"

그리고 화면은 검어진다.

분필은 하얀 색이고 칠판도 희뿌연 글자의 흔적들로 검다 할 수 없지만, "집은 검다"

 

 

 

시인이자 감독인 그녀의 신에 대한 갈구와 기도, 원형조차 찾기를 거부할 뭉개진 나환자의 얼굴

두 가지가 극중에서 내내 소리와 이미지로 결합될 때 관객의 좌석은 검은 극장 안에서 빛처럼 환할 것인가?

질문은 여기에서 공간으로서 답변하고, 답변은 극장 밖에서 다시 빛을 받아 탈퇴한다

 

[출처] 집은 검다|작성자 컷 cut과 송 song



21분 정도의 짧은 영화이기에 그 영화를 선택했다.

첫 화면부터 강렬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한센병에 대해 한번더 생각해보게하는 영화이다.

어린 학생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 것 세 개를 말해보라는네 손, 발, 눈이라는 대목을 보고 가슴이 막막했다.

어느 환자에게 집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문장을 만들어 보라니까

"집은 검다"라고 썼다.

"집은 검다" 라고 쓰는 사람도 없겠지만 집을 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들 마음은 아직도 검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