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금
양강(陽剛)의 신체,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장철(張徹)을 중심으로 본문
양강(陽剛)의 신체,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 장철(張徹)을 중심으로
이영재*
차례
1. 어떤 목격
2. ‘양강’을 둘러싼 국제적 우애- ‘액션!’ 레디고, 홍콩 신파무협편의 시대
3. ‘협’과 ‘산업’-산업화 시대의 아시아적 공통성
4. 맺으며
<국문초록>
1960년대 중반 시작된 쇼브라더스의 신파무협편은 이 스튜디오가 1960년대
내내 골몰했던 근대화와 지구화라는 목표에 가장 근접한 첫 번째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호금전의 <대취협>(한국제목 : 방랑의 결투)과 장철의 <독비도>
(한국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화교문화권을 넘어서는 놀라운 성공을 거
둬들였다. 1960년대 말 한국에서 이 영화들은 합작이 아닌 홍콩영화로는 최초
로 흥행에서 성공했으며, 이 성공의 여파는 곧 일련의 한국산 검객영화를 낳았
다. 여기에서는 이 영화들의 성공이 1960년대 초중반의 한국-홍콩 합작의 대규
모 스펙터클 시대극이 실패로 끝난 지점에서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한국과
홍콩, 여타의 아시아 지역에서 무협영화의 성공을 낳은 당대적 공통성이란 무
엇인가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가장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성공을 거둔 장
철의 영화를 중심으로, 강력한 남성성을 의미하는 ‘양강’의 신체와 이 신체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협’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다.
* 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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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협’의 개념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중국에서 (일본을 경유하
여) 무협의 개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것은 드디어 산업화 시대에 ‘양강’의
상상력을 얻었다. 무협이 전전 동아시아의 힘에 대한 열망과 저항의 거점을 동
시에 의미했다면, ‘양강’의 신체는 힘과 관련된 냉전의 질서와 전혀 무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동아시아 전체의 급격한 산업화와 그 과정에서 열망
된 강건한 남성 신체와 관련 있으며 동시에 공장의 규율 속에 놓인 이 신체들
의 상상적 전복과 관계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무협영화, 쇼브라더스, 장철, 호금전, 산업화, 양강, 검객물
1. 어떤 목격
1965년 당시 신필름의 임원식은 <대폭군> 촬영차 홍콩의 쇼브라더스
스튜디오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신필름-쇼브라더스의 첫
번째 합작영화 <달기>(1964)는 성공을 거두었고, 양 측은 재빨리 두 번
째 합작 프로젝트 <대폭군>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전작의 성공에 고무된
신필름의 신상옥과 쇼브라더스의 런런쇼는 이번에는 더 크고, 더 웅장하
고, 더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게다가 전작에서
미비했던 점, 이를테면 너무 중국적이라는 비판을 잠재울 수 있도록 불교
영화로 기획된 이 프로젝트는 각각 최은희와 리리화를 주인공으로 한 한
국버전/홍콩버전 두 편을 동시에 찍음으로써 내셔널 시네마와의 긴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대폭군>의 촬영
은 합작영화의 모든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
었다.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주연배우들의 살인적인 스케쥴, 언어소
통 문제, 게다가 한국에서의 야외촬영과 홍콩에서의 스튜디오 촬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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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색감의 불일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당초 2달 정도를 생각
했던 홍콩에서의 체류일정은 이미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땐 메구라검법(めぐら剣法, 맹인검법)을 쓰는 <자토이치> 영화가 일
본을 휩쓸 때야. 그러니까 홍콩도 슬슬 칼싸움 영화, 그 소림사 권법 초창기
걸 보믄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 권법 같어. 칼만 들어섰지. (중략) 그니까
내가 이 <대폭군>을 갔을 때, 촬영 하루 찍으면 사흘을 놀아야 되니까. 어
디 가냐면 홍콩 라이브러리(쇼브라더스 라이브러리-인용자) 가서 영화만
보는 거여. 그럼 홍콩 감독들, 나, 뭐 한 대여섯명이 맨날 일본영화만 보는
거야. 이걸 몇 콤마로 찍었냐, 이건 스톱모션이 된 거냐, 이건 고속, 그니까
뭐 편집서부터 특수촬영까지 엄청나게 공부해 가지고 왔어.”1)
결과부터 말하자면 <대폭군>은 한국과 홍콩 양측에서 모두 흥행에 실
패하였다. 그리고 두 내셔널 스튜디오의 횡적 결합으로서의 ‘아시아 영화’
에 대한 시도는 일단 여기에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임원식이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쇼브라더스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자 이후 전개될 아시아 액
션영화의 원점이 될 ‘신파무협편’의 창조과정이었다. 그해 10월 쇼브라더
스의 기관지 南國電影은 ‘무협 신세기’를 선포한다.
“무협 이야기는 천년 동안 중국에서 이어져왔다. (중략) 이 장르는 오랫
동안 ‘북파(北派)’의 무대 기술에 한정되어왔다. (중략) 또한 이 영화들은
리얼리티와는 동떨어진 신괴(神怪) 판타지에 경사되었다. 현대의 관객들은
리얼한 ‘액션’을 원한다. 이러한 목표를 두고 쇼브라더스는 ‘신파무협편’을
창조하는 운동을 개시하고자 한다.”2)
1) 임원식,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신필름 2 임원식, 이형표, 이상현,
김종원, 신필름 채록연구팀 채록연구, 한국영상자료원, 2008년, 82면
2) 「Shaws Launches “Action Era”」, 南國電影, 1965.10, 30면. 쇼브라더스가 론칭한
이 새로운 무협영화는 이전의 광동어영화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괴(神怪) 판타지’ 구파
무협편과 대비하여 리얼한 액션을 중시하였으며, 앞의 것과의 변별 속에서 ‘신파무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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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에 수많은 일본영화가 있었으며, 특히 일본
찬바라 영화가 신파무협편의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다는 임원식의 증언은
신파무협편의 시작으로 알려진 <강호기협(江湖奇俠)>의 감독인 서증굉
(徐增宏)의 다음과 같은 증언과 일치한다.
“나는 신파무협편이 ‘사무라이’ 영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구로사와의 <거미의 성> <요짐보> <츠바키 산쥬로>, 이나가키 히로시의
<미야모토 무사시> 그리고 무엇보다 <자토이치> 시리즈가 중요했다.”3)
이 장르의 가장 위대한 공헌자인 장철(張徹) 또한 그의 일본 찬바라
영화 체험을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일본은 동방 중의 서방이다. 우리들
은 서양영화(특히 헐리우드) 이외에 일본 ‘무사도(武士道)’ 영화의 영향
을 많이 받았다. (중략) 몇몇 무협영화 감독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
하는 걸 꺼리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베꼈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모자람을 병으로 삼아야 할 뿐이다.
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고, 무협영화도 이와 같은 높은 레벨로
찍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4)
말하자면 임원식은 우연히도 그때 그 장소에서 홍콩과 일본 사이에 오
간 영화의 국제적 순환, 그리고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현지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체험은 이후 어떤 한국 장르영화를 만
드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온통 식자들을 우환에 쌓이게 만들었
이라고 불려졌다.
3) 徐增宏(Xu Zhenghong), A Study of the Hong Kong Swordplay Film (1945-1980),
The Urban Council, 1981(Revised edition, 1996), p.204. 서증굉은 런런쇼가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던 감독이기도 하다.
4) Chang Cheh, Creating the Martial Arts Film and the Hong Kong Cinema Style,
The Making of Martial Arts Films-As Told by Filmmakers and Stars, Hong Kong
Film Archive, 1999, p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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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혹자는 한국영화의 ‘병통’이라고까지 부르게 만들었던 한국산 검술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대상은 바로 이 ‘무협 신세기’의 영화들, 즉
1960년대 중후반 쇼브라더스라는 화교 영화 자본의 기획으로서의 무협영
화이다. 이 영화들의 등장은 세 가지의 영화사적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첫 번째 1950년대 후반부터 쇼브라더스가 골몰했던 일련의 시대극, 여성
을 주인공으로 한 가족 멜로드라마의 내러티브와 스펙터클을 겨냥하여
만들어진 이 시대극의 직접적인 후신. 두 번째, 위의 증언이 보여주고 있
는 바처럼 일본 찬바라 영화에 대한 다대한 참조. 쇼브라더스는 1960년대
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영화 수입의 가장 중요한 수업사이기도 했다. 세
번째, 쇼브라더스와 여타의 내셔널 시네마들과의 ‘합작’이라는 트랜스내
셔널한 경험. 임원식 자신이 참가하고 있던 신필름-쇼브라더스의 합작은
이에 대한 적절한 사례를 제공해준다.
<달기>와 <대폭군>은 두 가지 점에서 신필름의 신상옥과 쇼브라더스
의 런런쇼가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적절한 합작 기획이었다. 신필름과
쇼브라더스는 각자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내러티브, 즉 가족 멜로드라마
로 상상된 시대극이라는 스토리에 동의했으며(쇼브라더스의 <양귀비>와
<측천무>, 신필름의 <연산군>, <폭군 연산>은 모두 역사의 배후에서 작
용하는 파괴적인 여성의 힘이라는 내러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1950년대
의 전세계적인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서 촉발된, 당시 헐리우드의 주류 경
향이었던 대작 스펙터클이라는 형태에 이 스토리를 담기로 하였다. 이는
고유한 네이션이라는 전제, 네이션들 사이의 공통요소의 추출, 추출된 요
소들의 기계적 결합을 통해 소위 ‘동양적 미감’을 창출함으로써 각각의 네
이션의 관객들의 요구에 부응하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 한편, 이 스
펙터클이야말로 헐리우드 대작영화에 맞설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 되리라
고 가정되었다.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이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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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중후반 홍콩 무협영화가 내셔널 시네마의 횡적 결합, 즉 합작 스펙터
클 시대극이 실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현하였다는 사실이야말로 중요
해 보인다.5) <대폭군>의 실패가 보여주는 것은 관객층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관객은 신파무협편에 열광하였다. 그들은 과
연 누구이며, 왜 무협영화에 심취하였는가?
쇼브라더스의 기관지인 南國電影의 1966년 9월호에는 흥미로운 기사
가 실려있다. 미국의 잡지 Life 팀이, 바로 전해 완성된 쇼브라더스의
거대 스튜디오 ‘무비타운’을 방문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방문 직후 Life
는 쇼브라더스에게 ‘동양의 헐리우드’라는 칭호를 선사했다.6) 1966년 호금
전(胡金銓)의 <대취협(大醉俠)>의 성공에 이어 1967년 드디어 쇼브라더
스는 장철의 <독비도(獨臂刀)>(한국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백만달러(홍콩달러) 영화의 시대로 돌입했다.7) 이때 ‘동양의 헐리우드’라
는 호들갑스러운 수사적 표현은 비록 제한적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문자
그대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이는 ‘헐리우드’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영화적 ‘보편성’, 즉 통용가능성이 최소한 <대취협>과 <독비도>와
같은 영화들이 성공을 거둔 지역 내에서는 분명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로 이때의 ‘보편성’, 통용가능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공통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이 글에서는 이 공통성을 두 가지의 계기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첫째,
산업화 과정에서의 도시 남성 하위 계급의 발생과 이들의 소비주체화. 둘
째,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든 아니면 그렇게 상상되거나 창출된 가치든 간
5) 1950년대 ‘자유진영 아시아’라는 광역 단위에서 비롯된 ‘아시아영화’라는 범주, 이에 대
한 일종의 실천으로서 등장한 <달기>와 <대폭군> 같은 합작영화에 대해서는 졸고,
「아시아영화제와 한홍합작 시대극 - ‘아시아영화’라는 범주의 생성과 냉전」, 대동문화
연구 제88집, 대동문화연구원, 2014를 참조.
6) 南國電影, 1966年 9月, 103頁.
7) 南國電影, 1967年 8月, 58頁.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47
에 문화정치적 공유 혹은 공동성을 활성화시키는 장치로서의 ‘협(俠)’. 그
러니까 누가, 왜 이 영화들을 보았는가?
2. ‘양강’을 둘러싼 국제적 우애 - ‘액션!’ 레디 고, 홍콩 신
파무협편의 시대
1) 쇼브라더스, 화교 디아스포라, 신파무협편
쇼브라더스의 전신은 1925년 상하이의 부호 쇼 가의 네 명의 형제들에
의해 만들어진 티엔이(天一) 영화사였다. 상하이의 부호 쇼 패밀리에 의
해 만들어진 티엔이(天一) 영화사를 전신으로 한 쇼브라더스는 이미
1930년대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규모 배급네트워크 쇼브라더스를 구축했
다. 이 회사는 1950년대에는 테마파크, 댄스홀, 중국어-말레이시아어 영
화 스튜디오를 거느린 거대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
나 1949년의 중국혁명(즉, 본토라는 광대한 시장의 상실)과 1950년대의
이 지역 신흥독립국가들에서의 내셔널리즘의 고조, 이에 따른 화교에 대
한 정치, 경제, 문화적 배제(즉,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에 대한 재정비)는
이 화교 사업가들에게 시장전략을 새롭게 재구성해낼 필요성을 강제하였
다. 쇼 패밀리의 넷째 런런쇼는 1957년 싱가폴에서 홍콩으로 거점을 옮기
며, 새롭게 영화 스튜디오로 쇼브라더스를 새롭게 개편, 기존의 광동어영
화 중심에서 만다린어 영화 중심으로 이 프로덕션의 산물을 일원화하는
한편 기술적인 진보와 더 넓은 시장의 창출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스튜디
오 재정비에 착수하였다.
쇼브라더스에 관한 매우 설득력 있는 분석을 행하고 있는 포섹 푸
(Poshek Fu)에 따르면, 1950년대 말부터 런런쇼가 추진한 쇼브라더스의
재편 전략은 지구화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로 요약된다.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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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강력한 참조대상으로부터의 시스템과 기술의 도입은 근대화 전략
실행의 핵심 중 하나였다. 포드-테일러 모델의 전면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 있는 스튜디오 ‘무비타운’으로 이 전략의 성과는 말 그대로 ‘과시’되었
고, 산업적 합리화는 가일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지구화 전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첫 번째, 다른
비서구 내셔널 시네마와 마찬가지로 쇼브라더스는 서방세계 영화제를 통
해서 인지도를 높이고자 했으며, 오리엔탈리즘과 액조티즘이 서방세계
관객들을 매혹시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東方色彩’ 혹은 ‘中國味
道’9)) 물론, 여기에서도 역시 중요한 참조틀은 이미 서방세계에서 존재감
을 과시하고 있던 일본영화였다. 게다가 ‘진정한’ 동양문화의 근원으로서
중국문화는 일본보다 서방세계에 어필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자원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 동서의 매개공간 홍콩을 뒤덮고 있었다. 1962년 이한상(李
翰祥)의 <양귀비(楊貴妃)>가 칸느영화제에서 기술상을 받았을 때, 이
믿음은 확신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두 번째, 좀 더 실질적으로 쇼브라더
스가 상정할 수 있었던 글로벌한 관객은 동남아시아를 포함하여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화교 커뮤니티였다.
“쇼브라더스는 발명된 전통과 공유된 과거, 공통어(만다린어)를 통해 표
현된 상상된 조국(homeland)으로서의 문화 중국의 의식을 형성해냄으로써
범 중국인(pan-Chinese) 커뮤니티를 투영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영화들
은 전 세계의 중국인 관객들의 내셔널리즘과 노스탤지어에 어필하였다.”10)
실제로 런런쇼를 포함하여 쇼브라더스의 가장 중요한 기획자와 감독
8) Poshek Fu, “The Shaw Brothers Diasporic Cinema”, China Forever, edited by
Poshek Fu, University of Illinois, 2008, p.15.
9) 南國電影, 1963年 1月号, 62頁.
10) Poshek Fu, op, cit., p.12.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49
들, 이한상(李翰祥)과 호금전(胡金銓), 장철(張徹) 등은 모두 본토 출신
들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타이완 국민당에 강력한 공감을 지니고 있던 이
들에게 홍콩은 일시적인 거처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피난민’들은 공산화
된 본토 중국을 ‘대리’하여 ‘불변하는 중국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전
세계의 화교들은 이 영화들을 보고 “디아스포라의 삶에도 불구하고 중국
인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을 계속할 수 있었다.”11)
쇼브라더스의 지구화 전략에 관한 포섹 푸의 논의에서 핵심은 동남아시
아를 포함한 전세계의 화교 문화권이 갖는 ‘디아스포라 의식’에, 그 스스로
가 디아스포라라고 의식했던 쇼브라더스의 기획, 창작자들이 정확히 부합
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이 분석은 쇼브라더스 영화를 광범위한 ‘중화’
문화권 내에서 사유할 때, 유의미한 참조점이 된다. 특히 1949년 중국 혁명
이후 타이완을 실질 영토로 하면서도, 믿음의 체계 속에서는 본토 중국을
자국 영토로 상정하고 있던 ‘중화민국’과 전세계 화교 디아스포라들에게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의 쇼브라더스 시대극이 어떻게 그토록 강력
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중화민족주의와 화교 디아스포라라는 키워드는 한계적인데, 왜
냐하면 1966년 이후 그 성공은 거기에 국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취
협>과 <독비도>가 동아시아 지역의 화교 커뮤니티 이외의 지역에서 거
둬들인 성공과 이후 동아시아 액션영화 전반에 끼친 강력한 영향력, 그
연속선상에서 만들어진 1970년대의 홍콩 무술영화가 이들 지역 내에서,
더 나아가 서구에서 지속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
면 안 된다. 이를테면 한국 같은 지역, 화교문화가 거의 의미가 없었으며,
강력한 국가 - 민족주의가 작동하는 지역에서 이들 영화가 성공한 이유는
분명 화교 디아스포라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이다.
11) Ibid, pp.13~14.
250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이 성공이 ‘무협영
화’라는 액션영화의 형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무협영화는 쇼
브라더스 특유의 문화 민족주의의 자취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 영화들은
정확히 “발명된 전통과 공유된 과거, 공통어(만다린어)”의 세계로 이루어
져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이전의 영화와 달랐다. 다시 한 번 포섹
푸의 논의를 환기하자면, 그는 무협영화들, 특히 장철 영화가 1960년대
중후반 싹트기 시작한 ‘홍콩인’이라는 인식(‘My City’)으로의 전환 속에
서 이루어진 디아스포라 의식과 ‘로컬 의식’ 사이의 교섭의 결과였다고 지
적한다. 일례로 장철의 젊은 배우들은 이전의 배우들과 달리 홍콩 출신이
었다. 로컬 의식은 1970년대의 홍콩의 경제성장과 인구 구성의 변화 속에
서 가속화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홍콩영화의 ‘홍콩화’라고 할 수 있을
현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의 홍콩영화에서
광동어는 다시 주류가 되었다.12)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역화 혹은 홍
콩화라고 할 수 있는 흐름 속에서 말 그대로 진정한 ‘글로벌 홍콩영화’13)
로의 도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요컨데, 로컬을 반영하는 순간 글로
벌한 공통성이 내재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2) 장철의 ‘양강’과 호금전의 ‘여협’
1967년에 한홍합작영화가 아닌 홍콩영화로는 최초로 한국에서 극장 공
개된 <대취협>은 흥행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에서
흥행의 가능성을 발견한, 즉 ‘일본 사무라이 영화 냄새’를 맡은 수입업자는
‘중국영화 냄새가 안 나게’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의 제목을 본 따 <방랑의
12) Ibid, pp.15~20. 이소룡의 <당산대형>이 광동어 영화였다는 사실은 이 사태를 예감케
하는 것이다.
13) 이를테면 데이빗 보드웰이 자신의 홍콩영화에 관한 연구서에 붙인 매혹적인 제목을
상기해보라. David Bordwell, Planet Hong Kong,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51
결투>라는 한국어 제목을 달았다. 14) 그러나 호금전은 <대취협> 이후
곧 쇼브라더스를 떠나 대만으로 갔으며, 이 영화가 거둬들인 한국 시장에
서의 ‘무협’의 성공을 이어간 것은 이후 쇼브라더스 무협-무술영화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이 될 장철이었다. 한국에서 개봉된 호금전의 영화는 <대취
협> 한 편인데 반해, 장철의 영화는 이후 지속적으로 공개되었다. 1968년
에 신필름에서 수입한 장철의 세 편의 영화, <독비도>, <변성삼협(邊城
三俠)>(한국제목 : 삼인의 협객) <금연자(金燕子)>(한국제목 : 심야의 결
투)가 연속 개봉되었으며, 세 편 모두 그 해의 흥행영화 베스트 10 에 들어
가는 기록을 세웠다.15)
장철의 영화는 격렬한 신체 훼손과 다량의 피, 죽음에 이르는 싸움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영화에서 무술감독을 했으며, 그 자신도
감독인 유가량(劉家良)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그가 얼마나 선연한 피에
집착했는지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어느날 장철이 유가량에
게 물었다. “내장에 상처를 입고, 심지어 내장을 쏟아가면서도 여전히 움
직일 수 있을까? 안될까? 어쨌든 피는 많을수록 좋은데.”16) 장철은 결정
적으로 홍콩영화를 ‘남성들의 영화’로 바꾸는 데 공헌하였다. 그가 매혹당
14) 2010년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김성근 채록연구 권용순, 한국영
상자료원, 2010, 193면. <대취협>이 개봉하기 전해인 1966년 세르지오 레오네의 A
Fistful of Dollars(1964)가 한국에서 <황야의 무법자>라는 제목으로 개봉,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신필름에 의해 수입된 이 영화는 1965년 일본에서 <황야의 요짐보 荒野の
用心棒>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으며, 마찬가지로 흥행에서 성공했다. 물론 신상옥이 이
영화의 한국 제목을 붙일 때, 일본 제목을 염두에 둔 것은 확실하다. 또한 A Fistful
of Dollars의 당시 한국 신문광고는 이 영화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의 리메이
크작임을 강조하고 있다. A Fistful of Dollars의 성공 이후 스파게티 웨스턴은 1960년
대 말 한국영화 시장에서 가장 꾸준히 인기를 모은 외화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대부분
의 제목들에는 원제와 상관없이 황야, 석양, 결투, 무법자가 들어갔다.
15) 이 세 편의 영화의 총 관객수는 무려 65만 명에 이르는 것이었다. 대한신문, 1968년
12월21일.
16) Interview with Lau Kar-leung, http://changcheh.ocatch.com/lau-int.htm
252 泮橋語文硏究 제39집
한 것은 젊은 남성들의 신체였으며, 그들의 벌거벗은 신체가 어떻게 파열
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실제로 그의 영화는 홍콩영화사상 최초로 젊은
남성 스타들의 영화였으며, 장철의 영화 경력은 왕우(王羽), 강대위(姜大
衞), 적룡(狄龍) 등 주요 남성 스타들의 변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장철은 자신의 영화를 ‘양강(陽剛) 영화’라고 칭하였다. 아마도 남성성,
영어의 masculinity로 번역 가능할 이 말은17), 장철 스스로가 말하건데,
그가 의식적으로 쓰기 시작하기 이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양강은
이미 홍콩사람들의 구두선(口頭禪)이 되어있다. 그것은 내 영화부터 시
작되었다.”18)) 장철은 양강, 즉 강력한 masculinity가 특정한 어떤 정서,
즉 ‘비장(悲壯)’의 발현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조금 긴 인용이지만, 다음의 언급은 장철이 왜 그토록 젊은 남성이 ‘죽도
록’ 싸우는 영화에 심취했는가를 보여준다.
“남녀는 천생유별(天生有別)하다. 원시시대부터 남성은 수렵으로서 생
계수단을 삼았고, 전투와 방어를 책임져서 개체를 보존했다. 여성은 자식들
을 낳아 기르고 종족을 면면히 길러내었다. (남성과 여성은) 자연히 다른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인류의 몇 천만 년의 발전 속에서 남성은 웅장(雄
壯)하고 여성은 온화하다. 난조(鸞鳥)를 억지로 봉황으로 만들면 자연스럽
지 않은 것이다. 청나라 개국 초기를 제외하고 즉 한족화한 이후에는 송나
라 이후로의 ‘중문경무(重文輕武)’를 이어받아 남자는 약하고 자신도 보존
할 수 없었다(그때 ‘동아병부(東亞病夫)’라고 불리웠다). 사람들은 여협(女
俠), 여장(女將)을 환상하게 되었고 이것들은 장회소설(章回小說)과 희극
(戱劇)에 반영되었는데, 이들은 절대로 자연에 합한 것이 아니었으며 현대
17) 스티븐 테오는 雄性 혹은 남성의 생식기관을 뜻하는 陽과 불교의 성자 중 한명이자
자주 근육질의 벌거벗은 상체를 드러낸 포악한 얼굴을 가진 형상으로 표상되어온 金剛
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파악한다. Stephen Teo, Chinese Martial Arts Cinema,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9, p.94.
18) 張撤, 張撤談香港電影, 三聯書店(香港)有限公司, 2012, 51면.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53
관중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다만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구습에 사로
잡혀서 관중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중략) 動作片(액션영화-인
용자)은 언제나 비장감이 있어야 한다. 비장한 기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는 웅장한 남성이 등장해야 한다. 이 웅장한 남성은 상냥한 여성을 좋아한
다. 그러나 분냄새 나는 남성과 건장한 남자 같은 여성은 언제나 남자 같은
남자만 못하다. 여성은 여성스러운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이다. 여성은 저절
로 비극이 있는데, 다만 그것은 비참이지 비장이 아니다. (중략) 남자가 전
쟁터에 나가서 팔뚝을 걷어부친다면 아주 비장하지만, 여인이 팔뚝을 걷어
부친다면 어떤가? 그저 섹시함을 느낄 뿐이다.”19)
장철의 이 노골적인 남녀유별의 언설은 실은 여성 멜러드라마 위주의
당시 홍콩영화에 대한 비판이자, 1950년대 다수의 광동어와 약간의 만다
린어로 만들어진 구파무협편에 대한 비판이며, (더 나아가서는) 호금전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호금전은 여협에 심취했다. <대취협>은
정의로운 여협의 이야기였으며, 이 영화는 이미 언급했다시피 대성공을
거두었다. 호금전은 곧 쇼브라더스를 떠났으나, 여협은 이후 그의 영화의
중요한 테마로 자리 잡았다(예컨대 <협녀(俠女)>). 북경 출신의 호금전
은 경극과 고전 중국 회화에 대한 깊은 조예로 유명했으며 그의 영화는
고전적인 중국 미에 대한 현대적 계승으로 평가받았다. 장철이 동아시아
전역에서 거둔 상업적인 성공과 이후 홍콩영화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이
소룡부터 성룡, 오우삼, 임영동에 이르기까지)에도 불구하고 홍콩영화가
본격적인 비평 혹은 영화학의 담론 대상이 되었을 때, 호금전이 먼저 발
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금전의 영화는 비할리우드권 영화 담론이 갖
는 내셔널 시네마에 대한 열망(‘중국적 미’)과 젠더적 이슈 생산에 더 적
합했다.20) 호금전의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협녀>(1969)
19) 위의 책, 53~54면.
20) 1990년대 이후 중국어권 비평가들과 서방세계 비평가들이 왜 장철이 아닌 호금전에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이빗 데써의 분석은 호금전의 영화적 특질
254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의 영어 제목이 <Touch of Zen>인 것은 그야말로 적절해 보인다. 호금
전의 영화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한편으로 이를 이용하고 동시에 견
제하는 중화권 내부의 내셔널리즘, 그리고 페미니즘적 해석의 매우 중요
한 견본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이 이야기는 장철이 호금전에 비해서 덜 내셔널리스틱하다는 것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하이 출신의 장철 또한 호금전만큼 중국적 문화
유산과 전통에 민감하였다.21) 그러나 스티븐 테오의 중요한 지적처럼 장
철 영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폭력의 미학화와 ‘죽음의 개인주의’22)는
그의 영화의 스토리와 문화적 표상, 전통적 가치를 덮어버릴 뿐 아니라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내셔널리즘을 극도로 추상화시킨다. 이 모호한 혹
은 추상화된 내셔널리즘은 쇼브라더스의 신파무협편의 두드러진 특징이
기도 하다. 동남아시아 전역을 시장으로 삼아야 했던 쇼브라더스는 그들
이 고수하고 있던 한족 중심의 문화민족주의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지
역으로의 수출에 적합한 작품 양식을 찾는 데 고심하였다. 장철의 영화는
이 프로덕션이 찾아낸 첫 번째의,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이었다.
에 대한 간명하지만 핵심적인 언급이기도 하다. “은연중에 심지어 노골적으로 여성중심
의 영화인 호금전의 영화는 흥미로운 젠더 이슈를 불러낸다. 1990년대의 아카데믹한
필름 스터디가 페미니즘 위주의 여성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왜 그의 영화가 관심의 중심
이 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준다. (중략) 중국어권 학자들과 서방세계 학자들은 서구
중심적 비평에 대한 거부라는 프로젝트에 공명했으며, 호금전의 작업의 중국적 에센셜
리즘을 강조하는 데에 합의했다. (중략) 그는 클래식한 중국 장르를 재활성화시켜 고전
적 중국적 미로 엮어낸 천재적인 창작자이자 작가(auteur)로서 선언되었다.” David
Desser, Making Movies Male, Masculinities and Hong Kong Cinema, laikwang
Pang & Day Wong edit., Hong Kong University Press, 2005, p.19.
21) 일례로 경극에 대한 장철의 참조는 호금전보다 더 직접적인 것이었다. 경극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그의 1970년 영화 <복수(報仇)>는 경극 <계패관(界牌关)>의 한 장면
과 영화의 장면을 겹쳐놓고 있으며, 장철 영화의 반복되는 모티브 중 하나인 선 채로
맞이하는 죽음은 경극에서 특징적인 죽음의 양식이었다. Stephen Teo, Chinese martial
Arts Cinema, p.99.
22) Stephen Teo, op.cit., p.98.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55
이러한 특성은 왜 그의 영화가 한국과 같은 지역에서 그토록 인기가 있었
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이후에 조금 더 설명하겠지만 ‘협(俠)’이라는 가
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의 젊은 남성 주인공들은 저항자, 반항자의 이미
지 속에서 움직이며, 이것은 내셔널리즘의 문제와 별도로 영시네마로서
젊은 남성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호금전의 여협과 장철의 양강 간의 대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대
취협>과 <금연자>(1968)이다. <대취협>의 성공 이후 쇼브라더스는 이
영화의 속편을 만들고자 했으나, 같은 해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와 결별하고
타이완으로 떠났다. 쇼브라더스는 <대취협>의 속편 <금연자>(1968)를
장철에게 맡겼다. <대취협>으로 스타가 되었고, 같은 주인공의 이름을 딴
<금연자>의 여주인공을 맡은 정패패(鄭佩佩)는 여기에 깊은 우려를 표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녀의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23) <금연자>는 장철
영화 중 여협(금연자)이 등장하는 희귀한 예가 되었지만, 장철이 이 영화
에서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금연자가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 남자
은봉(왕우)이었다. 강호를 떠나 은거하고 있는 금연자를 불러내기 위해 강
호를 분란에 빠트리고, 결국 그녀 앞에서 죽음에 이르는 싸움을 벌이는
은봉의 이야기인 <금연자>는 장철 특유의 부서지는 젊은 남자의 신체와
죽음에의 도취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금연자>가 <대취협>의 속편임에도 불구하고 장철이 정패패를 ‘무
시’한 이유는 자명하다. “비장한 기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웅장한 남
23) 이 전설의 여배우는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둬들인 이안의 <와호장룡>을 통해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와호장룡>에서 젊은 여협 장쯔이의 사부로 등장하는 그녀의 존재는
이 영화가 이안이 호금전에게 바치는 오마쥬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2003년 한국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쇼브라더스 특별전’을 개최하였고, 정패패를 초청했다. 호
금전과 장철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단호했으며, 특히 <금연자>에서 자신이 맡은 캐릭
터에 대한 실망은 여전히 생생한 것이었다. “<금연자>의 금연자는 협객이 아니라 남성
에게 종속된 여성일 뿐이다.” 2003년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쇼브라더스 특별전
에서의 발언.
256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성이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내러티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젊은 남성 사이의 거의 사랑에 근접해 있는 우정이며, 한 젊은 남
자는 또 다른 젊은 남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온
통 찌르고 베이고 터지고 그리고 흘러넘치는 피로 뒤범벅되는 이 몸과 몸
의 대결을 성적 메타포로 읽어내는 것은 수월한 일이다. 이소룡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무술영화가 ‘남성의 남성에 대한 응시를 허락하는 유일한 영
화적 형태’로서 발전했다는 이본느 태스커의 분석에 수긍한다면24) 그 첫
머리에 놓일 수 있는 것은 장철의 영화가 될 것이다. 이 남성들의 우정과
결투의 영화에서 여성은 거의 존재감이 없거나, 혹은 극도로 정형화된 양
식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장철 영화를 퀴어적으로 해석하
도록 이끈다.25) 장철 본인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
만, 그가 피의 형제애(blood brother)라고 부르는 이 특성이 더 넓은 맥락
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피의 형제애는 중국 무인(武人)의
패러다임이다.” 더 나아가서 몇 천 년 전부터 “남성은 상호지원의 유대를
형성했으며, 의로움에 기초한 우애를 쌓아나갔다.”26)
장철은 틈틈이 그의 영화가 얼마나 중국 고전과 관계있는지를 밝히고
자 하였으며, 남녀유별이야말로 “고등한 인간 문화”의 고유한 특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장철의 언급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세계가 ‘폭력’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양강 액
션영화는 지속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24) Yvonne Tasker, Fists of Fury, Asian Cinemas : A Reader and Guide, Dimitris
Eleftheriotis & Gary Needhamp edit., University of Hawaii Press, p.445.
25) 장철영화에 대한 퀴어적 해석에 대해서는 중화권 영화사에 대한 스탠리 콴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양과 음/중국영화 속의 젠더 男生女相-中國電影之性別>(1996)을 참조.
26) Chang Cheh, Chang Cheh : A Memoir, Hong Kong Film Archive, 2004, p.101.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57
3) 정치미학으로서의 비장
“이 세계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여전히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면 양강 액션영화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남성들
의 우애는 양강에 본질적인 것이며, 호모섹슈얼리티로 다만 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27)
이 이야기는 왜 장철이 그토록 강력한 남성신체(陽剛)에 직적접으로
가해지는 타격과 이로 인한 파열(이를테면 쏟아지는 내장과 사지절단)에
집중하였는지, 그래서 그 강력한 신체가 죽음이라는 한계에 부딪치는 ‘비
장(悲壯)’에 열광하였는지에 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장철 영화의 특질
은 호금전과 대비했을 때 명확히 드러난다. 호금전의 경우 그가 사랑한
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가벼운 공중에서의 움직임이었다. <협녀>의 가장
놀라운 장면들, 거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대나무 잎을 밟고 하늘을 날라
가는 여협의 형상은 장철의 영화적 스타일과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는
것일 게다. 호금전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토록 ‘우아’해 보이는 것은 그
들이 중력-즉 이 세계의 규칙을 가볍게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 초월이 가
능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28) 반면 장철의
젊은 남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이 세계 내에서의 대결이다.
‘비장’은 세계와 자아와의 대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미학
이다. 비장미의 발현은 이 대결에 있어 패배를 예정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싸움을 지속하고, 끝내 선채로 버티며 쓰러질 때 발생한다.29) 장
27) Ibid, p.103.
28) 이안의 <와호장룡>은 이 점에 있어서 진정 호금전의 영화 미학을 계승하고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여협’은 절벽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영원히 고정된 프리
즈 프레임이라는 영화적 장치 속에서 이 장면은 추락이 아닌 ‘비상’으로 읽어낼 수 있다.
29) 한국의 문학사가 조동일은 한국 고전의 미적 범주를 숭고, 비장, 우아, 골계로 나누었다.
「한국문학의 양상과 미적 범주」, 한국문학 이해의 길잡이, 집문당, 1996. 조동일의
경우에 이 미적 범주의 기준은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의 융합과 상반의 문제였다. 이
258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철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폭력으로 만연해 있으며, 그 속에서 개인은
세계와 맞서 싸우는데, 그 개인은 무엇보다 젊은 남성이어야 한다. 누구
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아시아적 상황 속에서 공적인 정치 주체는 남성이
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특히 젊은 남성이란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언
제나 잠재적 ‘후계자’이거나 ‘반역자’였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장철의 세
계와 폭력, 그리고 비장미에 대한 찬가가 그의 정치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쇼브라더스라는 스튜디오 소속 감독으로서, 국제적으로 놀라운 상업적
인 성공을 거둔 자로서의 그에 대한 흔한 오해와 달리 장철은 영화가 한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민감한 촉
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화-정치, 영화 사회학을 자신의 기획과 그
효과 안에 포함시켜 고려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이 상하이 출신의 정치학
도는 초기 타이완 국민당 문화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바 있었다.30) 1923
년생인 장철은 1945년 중국의 승전 직후 상하이 국민당의 문화사업위원
회(Cultural Movement Committee) 위원으로서 그의 정치경력을 시작
했다. 타이완으로 옮겨간 이후 첫 번째 영화 <아리산풍운(阿里山風雲)>
(1950, 이 영화는 타이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만다린어 영화였다)을 찍
은 장철은 장경국(蔣經國)의 신임 속에서 국민당의 국책영화사 Central
Motion Pictures Coporation(CMPC)의 고위 간부를 지냈다. 1957년 홍
콩으로 거점을 옮긴 장철은 시나리오와 비평을 썼고, 1962년 각본가로 처
구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딜타이의 미적 범주였다. 그에 따르면 숭고와 비장
은 모두 주관에 대한 객관의 우월에서 비롯하며, 비장은 자아가 세계와의 대결에서 실
패했을 때 비롯된다. 반면 우아와 골계는 객관에 대한 주관의 우월에서 비롯된다고 파
악하였다. 조동일의 ‘미적 범주’는 한국 고전을 세계적 ‘보편’ 속에서 재정립시키고자
한 시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0) 장철의 초기 경력에 대해서는 Chang Cheh, Chang Cheh : A Memoir, Hong Kong
Film Archive, 2004, pp.40~50.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59
음 쇼브라더스에 입사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홍콩의 가장 에너제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젊
은이들은 분투하였고, 사랑 이야기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대중은 반항적인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으며, 식민당국은 시스템에 쇼크를 입
었다. 양강과 무협영화는 이 시대의 이런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독비도>
를 만들자마자, 구룡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 기간 동안 나는 <암살
자 大刺客>를 만들었다.”31)
<독비도>와 <암살자>(1968)를 만들던 당시를 기술하는 장철의 위 언
급에서 그가 1967년 홍콩에서 벌어진 사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까지는 알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철이 홍콩의 정치-사회
적 흐름에 대한 민감한 반응 속에서 이 영화들을 구상하고 만들었던 것만
은 명백한 것 같다. 홍콩의 한 비평가가 말하고 있듯 “스크린 위에서 벌어
지는 싸움은 이 도시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반사하는 것이었다.”32)
1966년부터 1967년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의 구룡 폭동은 계급투쟁이
자 세대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66년의 제1차 구룡폭동은 스타페
리호의 운임 인상으로 촉발되었으며, 1967년의 제2차 구룡폭동은 구룡의
한 공장에서 발생한 노동분쟁이 계기가 되었다. 홍콩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심 지역의 만성적인 주택난, 그리고 본토 문화혁명의 여파 속에서 등장
한 이 반영(反英)시위에 참여한 대다수의 젊은 노동자와 학생들은 홍콩
출신이었다. 다시 말해 이 ‘홍콩인’들은 더 이상 임시 피난처가 아닌, 냉전
과 식민지라는 이중 굴레 속에 놓인 홍콩이라는 도시의 자각을 요구하고
31) Zhang Che(Chang Cheh), Creating the Martial Arts Film and the Hong Kong
Cinema Style, The Making of Martial Arts Film-As Told by Filmmakers and
Stars, The Provisional Urban Council, 1999, p.21.
32) Sek Kei, A Study of the Hong Kong Martial Arts Film, Hong Kong Urban Council,
1980, p.2.
260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있었으며, 산업화 속에서 노동자로서의 각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철 영화의 상업적인 성공은 명백히 홍콩 사회의 사회적, 인구적, 산
업적 변동과 연동되어 있었다. 전후에 태어난 젊은 관객들이 홍콩영화의
가장 주된 관객층으로 부상했는데, 텔레비전의 빠른 보급은 관객층의 변
화에 영향을 미쳤다. 홍콩의 산업은 빠르게 발달해갔고 그 과정에서 대규
모의 도시 노동자 계층을 만들어내었다.33) 그 스스로 비평가이기도 했던
장철이 매우 마음에 들어 했던 로우카의 평가처럼 “그의 주인공들은 체제
와 권위에 도전하는 비극적인 남자들”이었다.34)
이 이야기는 또한 1960년대 말 한국에서 시종 죽음에 홀린 듯 싸우고
또 싸우는 이 젊은 남자들의 영화가 왜 그토록 어떤 계층, 어떤 세대, 어떤
성별에게 매혹적일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장철의 영화는 한국에서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물론 한국에서 그의 영화는
홍콩적 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보여줬다. 한국의 영화 담론 속에서 이 영화
들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한 ‘알맹이 없는 중국제 검객물’35)에 불과한 것
이었으며, 식자들을 우환에 휩싸이게 만드는 문화적 병통으로 간주되었다.
3. ‘협’과 ‘산업’ - 산업화 시대의 아시아적 공통성
1) 홍콩 무협영화와 한국영화 - 고무신 관객으로부터 양강의
관객으로
홍콩에서 돌아온 임원식은 그가 사숙했던 자토이치 座頭市의 「맹인
33) 홍콩영화와 산업적, 인구적 변동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Teresa Ma,
“Chronicles of Change : 1960s-1980s”, Changes in Hong Kong Society Through
Cinema, Hong Kong Urban Council, 1988.
34) Chang Cheh, op.cit, p.22.
35) 대한신문, 1968년 12월 21일.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61
검법」을 응용, 여성 맹인 검사 이야기 <맹수>와 양팔을 잃은 검사 이야
기 <팔 없는 검객>(<독비도>와 거의 동일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양팔을 모두 잃고 입과 발가락을 사용해서 싸운다!)
을 만들었다. 이런 영화들의 목록은 계속 나열될 수 있다. 최경옥은 마찬
가지로 여성 맹인 검사 이야기인 <비연맹녀>(1968)와 속편격인 <천마
산의 결투>(1971), <오인의 자객>(1968), <괴도의 검>(1969)을 만들었
다(최경옥은 최은희의 남동생이자 신필름의 제작부장이었다. 신필름 영
화들에 연출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그는 임원식이 홍콩에 체류하던
당시 종종 이곳에 들르곤 했다). 강범구는 부모와 처자를 잃고 한 팔마저
빼앗긴 외팔이 검객의 복수극인 <대검객>(1968)을 만들었다. 그리고 표
상의 차원에서 한국산인지 홍콩산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영화들, 이른바
‘위장합작’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홍콩 액션영화의 이 광범위한 수용에는 한국영화 산업 내부의 사정도
게재되어 있었다. <대폭군>이 흥행에서 실패한 1966년은 한국과 홍콩영
화 양쪽 모두에게 일종의 전환기였다. 관객들의 취향은 변하고 있었고, 이
상황에 맞추어 양쪽 영화는 모두 새로운 자구책을 찾아나가야 했다. 한국
의 경우를 보자면, 기본적으로 가족 멜로드라마의 내러티브로 구성된 시
대극의 흥행성공을 뒷받침했던 것은 중장년 여성관객층의 존재였다.36)
“옛날에는 관객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안 왔어. ‘고무신짝’이라고 해가지
고 그래야 장사된다고 그랬거든. 그렇게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
들면 관객이 많이 안 왔어, 보지를 않았지. 전형적인 한국의 가족제도에서
구박받는 며느리라든가 기구한 여인의 운명, 뭐 그런 것들이 흥행이 잘되고
36) 1960년대의 관객층을 분석하고 있는 이길성에 따르면 1960년대 한국영화의 주된 장르
가 멜로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 특히 중장년층 여성” 관객에 힘입은 바
크다. 이길성, 「1960, 70년대 상영관의 변화와 관객문화」, 한국영화사 공부 1960-1979,
한국영상자료원, 2004, 2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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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로부터 반응을 받고 그랬지. 그러니까 젊은 세대들이 영화를 안 봤다
고. 그런데 인제 자기네들 세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니까 “야, 이
거, 뭐.” 그리고 가보니까, 영화가 시대적으로 앞서 있었던 거지.”
위의 언급은 <맨발의 청춘>(1964)으로 한국산 청춘영화의 대표적인 감
독으로 부상한 김기덕의 증언이다. 나카히라 코우(中平康)의 진흙투성이
순정 泥まみれの純情(1963)의 무판권 ‘번안작’이라고 할만한 <맨발의
청춘>은 흥행에 성공했고, 이후 이 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했던 배우 신성
일-엄앵란 주연의 일련의 청춘영화들이 만들어졌다. 60년대산 청춘영화의
등장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맨발의 청춘>의 사례가 보여주
듯이 당시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던 청춘영화의 영향. 주지하다시피 당시
한국영화 제작 상황 속에서 ‘안정적인’ 시나리오 공급처가 되었던 것은 일
본영화 잡지에 실린 시나리오의 번역, 번안이었다. 두 번째, 1960년의 4.19
는 이승만의 독재정권에 대한 계층과 세대를 막론한 저항이었지만, 이 사
건은 결과적으로 청년층의 세대의식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 ‘전후 세대’는 최초의 한글세대이기도 하였다. 이후 4.19 세대라고 불
리워질 이들 청년층은 한국영화가 새롭게 끌어들어야 할 관객층으로 급부
상하였다.
그러나 이 60년대산 청춘영화들은 김기덕의 말처럼 ‘고무신짝’ 관객들
이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시대적으로 앞서 있었다.’ 한국영화의 관객층이
젊은 관객이 주류가 됨과 동시에 그 내부에서 성별, 계급별 분화가 일어난
것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이다. 이러한 분화는 물론 홍콩이 그러한 것
처럼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37) 1970년대 서울의 극
37) 한국의 경우 상업적인 새로운 장르의 모색과 더불어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것은 국가 정책의 변화였다. 왜냐하면 자국내 영화 자본의 열악함과 군사독재정부라는
두 요인은 모두 국가와 영화를 과도하게 밀착시켜놓았기 때문이다. 1966년 개정된 영화
법은 외국영화수입의 쿼터배정에서 한국영화의 수출실적을 중요한 쿼터 배정의 기준으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63
장문화를 조사한 한 보고서는 당시의 영화관객층이 60년대와 비교해서 어
떻게 바뀌었는가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지표를 보여주고 있다.38) 960년대
말부터 급증하기 시작하는 변두리 재개봉관은 70년대 영화관객의 전반적
인 하락 속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공간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장르
는 홍콩 무협-무술영화와 한국산 액션영화, 그리고 70년대의 강력한 한국
영화 장르 중 하나였던 호스테스 영화였다. 반면 가장 인기 없는 장르는
하이틴 영화였다.39) 이와 같은 사실은 왜 이 장소들이 불결과 폭력, 절도
등의 도시악과 미성년자의 불법관람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서만이 그토
록 빈번히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는가에 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말하자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관객은 도시로 유입된 젊은 남성 노동자, 룸펜 프롤
레타리아, 학교를 ‘땡땡이’ 친 소년들이었다.40)
요컨대, 김기덕이 증언하고 있는 <맨발의 청춘> 류의 영화가 시내의
개봉관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의 관객이 4.19세대라고
통칭되는 ‘대학생’ 집단과 이 집단에 대한 일군의 동경자들로 이루어진 것
로 삼았으며, 이로써 한국영화는 해외시장 진출에 일층 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70년대 한국영화의 가장 지속적인 장르가 될 합작무협영화는 이 가운데에서 등장하
였다. 종종 이 영화들은 위장합작의 형태를 띄웠으며, 한국영화로 카운트되는 동시에
각 영화사의 수출실적을 채워주기도 하였다.
38)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영화의 주요한 관객집단은 연령적으로는 중장년층, 성별로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대로 1970년대에 들어와 이들 중장년, 여성 관객집
단은 TV와 같은 영화의 경쟁매체에 상당부분 흡수되어버린다. 따라서 1970년대에는
영화를 소비하는 주요관객 집단층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길
성․이호걸․이우석, 1970년대 서울의 극장산업 및 극장문화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2004, 87면.
39) 위의 책, 99면.
40) 경향신문, 1977년 3월 28일. 혹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보라. “1960년대 말에 서울에
올라와 서대문에 있는 중국집에서 일하던 나로서는 개봉관에 갈 여유가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가격이 싸고 한번에 2편을 볼 수 있는 극장들에 주로 갔다. 서대문에
있는 대흥이나 만리동에 있는 봉래와 같은 극장들을 주로 이용하였다.” 박윤재 인터뷰,
이길성․이호걸․이우석, 앞의 책, 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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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면, 1960년대 말 이후 재개봉관을 채우고 있던 관객들은 세대적으로
는 거의 동일하지만 계급적으로는 전혀 다른 구성원이었다고 할 수 있
다.41) 말하자면 장철 영화는 이러한 흐름의 첫 머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
자, 1970년대 한국의 하위 영화문화의 한 흐름을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
신파무협편의 등장이 홍콩의 인구적, 산업적 변동과 관계있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역시 이에 조응하는 인구적, 산업적 변동이라는 문제가 개입
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단지 새로운 관객층의 등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일국을 넘어서는 공통성으로서의 젊은 남성 노동자, 룸펜프
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 젠더적, 세대적 공통성의 등장을 보여주는 것이
기도 하다. 어쩌면 바로 하위계급의 젊은 남성들이라는 이 영화들의 주된
관객층의 문제야말로 홍콩산 액션영화에 대한 식자들의 근심과 정부의
지속적인 규제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1968년 한국에서의 장철 영화의 놀라운 성공은 영화 식자들로 하여금
이런 ‘홍콩산 검객물’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제안하도록 하였다. 정부는
1969년 ‘백해무익한 중국검객물’ 영화의 수입규제에 들어갔다.42) 홍콩영
화에 대한 수입규제는 1970년대 내내 주기적으로 시행되었다.43) 누군가
는 이 영화들의 성공은 “관객들의 양식을 뒤집어 보게끔 하는 일”이라고
분노했으며,44) 또 누군가는 “한결같이 잔혹성에 의한 쇼킹도로 외화가를
석권하자 국내서는 단독 또는 한홍합작으로 국적도 고증도 없는 검객물
을 마구 찍어내고 있다”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45) 이 누군가의 탄식처럼
41) 1970년대 한국에서의 홍콩산 액션영화(그리고 그 아류라 할 수 있을 한국산 권격영화)의
유행과 도시 하위계층 남성이라는 소구층의 문제에 대해서는 졸고, 「중공업 하이모던
시대의 아시아적 신체 - 1970년대 한국에서의 홍콩영화의 수용」, 여성문학연구 30권,
2013.
42) 경향신문, 1968년 6월 15일.
43) 매일경제, 1970년 1월 6일.
44) 동아일보, 1968년 12월 10일.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65
홍콩산 무협영화는 수많은 한국산 검객영화들을 만들어냈다.
확실히 식자들의 우환은 비록 엘리트주의에 가득 찬 일방적인 매도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첫째, 이들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영화에서 ‘검’이란, 활극영화의 전통
안에서도, 사극영화의 전통 안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46)
검술영화의 고증 문제란 가장 빈번하게 제기되는 문제제기의 방식이었다.
“이조 시대에 언제 그처럼 칼싸움이 많았고, 무인이 많았고, 살인이 다반사
로 행해졌는지 어리둥절해진다.”47) 물론 이 식자의 반응은 이제 막 시작된
이 ‘장르’ 영화의 장르적 규약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이 영화들이 주었던 ‘낯선’ 감각은 이곳에서 전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즉, 식민지라는 통한의
결과를 초래한 ‘문약’한 조선은 민본과 인정에 기반한 덕치의 나라로 이해
되어야 했다.48) 가족 멜로드라마인 궁중 사극은 빈번히 덕 없는 여인들의
45) 신아일보, 1969년 12월 13일.
46) 김소영은 한국의 액션영화를 일본의 검술영화, 홍콩액션영화, 헐리우드 액션영화 등의
다양한 힘들이 붐비는 ‘콘택트존’에서 태어났다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복합적인
형상 앞에서 헐리우드 모델에 기반한 장르 이론은 충분한 설명 방식이 될 수 없다. 김소
영, 근대의 원초경, 현실문화, 2010, 266~287면. 나는 이 통찰력 있는 지적에 덧붙여,
이 영화들을 누가 소비하는가, 라는 관객을 상정할 때 이 전통적인 장르 이론은 불충분
한 해석 방식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홍콩영화와의 관련 속에서 말하자면, 빈번한
위장합작 속에서 내셔널리티의 소구 자체가 모호해진 이 소비 현상은 이 영화들을 오히
려 전지구적 상품의 형상에 더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 이 상품의 세계에서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47) 동아일보, 1969년 8월 8일.
48) 조선사 연구자인 정다함은 식민지 경험을 통한 조선사에 대한 ‘정체성론’ ‘타율성론’에
대한 강한 반감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민족사학의 움직임이 어떻게 ‘전쟁을 지양하며
민본, 인정에 바탕을 둔 정치를 지향하는 유교적 군주상’으로서의 조선의 왕들의 이미지
를 만들어냈는지를 언급하며, 오랑캐 ‘여진족’과 대마도를 대상으로 했던 조선왕조의
빈번한 ‘정벌’을 통해서 이러한 관점을 탈구축해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민족사
학적 전통은 이 전쟁들을 ‘항쟁사’로 기술하면서 그 결과 국경선의 확립이라는 근대
국가적 영토 개념을 도입시킨 결과이다. 정다함, 「조선초기의 ‘征伐’-천명, 시계,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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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 사건을 보여주지만, 덕 있는 남성들의 살육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사극에서 남성들의 폭력이란 반정과 같은 쿠데타의 순간에 잠시 잠
깐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 폭력은 상시적인 내러티브의 추동 요인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국의 사극 ‘전통’ 안에서 보자면 이 식자의
말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즉, 기존의 한국영화 안에서 보자면 홍콩
무협영화는 자국양식화 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둘째 홍콩 무협영화는 한국영화의 강력하지만 은폐된 참조대상, 즉 잠
재적인 두려움의 대상인 일본영화라는 그림자를 불러내왔다. 게다가 이는
홍콩 무협영화에 끼친 일본영화의 영향을 염두에 두자면 근거 없는 불안
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영문학자이자 저명한 국어학자이기도 했던 양주동
은 “홍수처럼 유행하는 검술물” 속에서 일본 문화의 “잔재” 혹은 “재침윤”
이라는 “눈살을 찌푸릴만한 예”를 발견하고 있다.49) 이는 양주동이라는
국문학자의 ‘과민한’ 반응이 아니었다. 한 식자가 단언컨데 “특히 일본식의
칼춤은 의식적으로라도 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얼’을 모독하는
무의미한 상행위밖에 안 된다는 것이 뜻있는 이들의 이야기”였다.50)
요컨대, 한국산 검객영화는 검의 부재에 기초한 덕치전통에 대한 위배,
일본 문화의 재침윤이라는 두 가지 이유에서 모두 내셔널 시네마의 담론
내에서는 ‘긍정’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무협영화는 발빠르게 정착했고, 이 장르의 영화에 있어서 내셔
널의 귀속은 점점 더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약무기」, 역사와 문화 vol.21, 2011. 특히 위의 언급은 근대국가적인 폭력의
독점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사사로운 무기의 소유, 광범위한 칼의
소유와 그것의 운용에 대한 정다함의 의견으로부터 다대한 시사를 얻었다.
49) 梁柱東, 「日語慣用化․劍術物까지 등장」, 매일경제, 1970년 8월 15일.
50) 동아일보, 1967년 11월 11일.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67
2) 무협과 무사도
그런데 이 영화들은 다시 한 번 환기하건데, ‘무협영화’였다. 즉, 이 영
화들의 인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공통된 대중문화적 자원으
로서의 ‘협’이라는 개념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홍콩 무협영화에 관한 스
티븐 테오의 논의는 중국 전통 내에서 ‘무(武)’와 ‘협(俠)’의 기원을 다시
금 환기시킨다.51) 협은 분명 오래된 개념이다. 중국문헌에서 ‘무’와 ‘협’을
최초로 함께 쓴 것은 한비자(韓非子)였다. 한비자에 따르면 협은 무로써
禁(法)을 범하는 것이다.(俠以武犯禁) 법가 한비자에게 부정적이었던 이
개념은 사마천의 「유협열전(游俠列傳)」에서 ‘무로써 법을 범하고 권위를
무시하지만 언신행과(言信行果)의 행동규범에 입각하여 약자와 액곤(厄
困)한 자를 도와줌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 자의 속성으
로 기술되고 있다.52) 협에는 정치적, 윤리적 정의와 그 수단으로서의 폭
력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53)
중국 문헌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던 이 협을 근대적 대중문화의 양식 속
으로 다시 불러온 것은 일본의 초기 모험소설가이자 야구 팬이었던 오시
51) Stephen Teo, Chinese martial Arts Cinema,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9, pp.2~3.
52) 박희병, 「조선후기 민간의 유협숭상과 유협전의 성립」,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276면. 아울러 조선후기 매우 성행했던 유협의 형상과 한국 근대문학의 관계를
해명하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논문이 있다. 한기형은 한국 근대문학의 기념비적인 소설
인 염상섭의 삼대를 분석하면서, 이 소설의 사회주의자의 형상이 유협의 전통과 관련
이 있으며, 이 ‘통속적’인 형상을 전유함으로써 식민지하에서 사회주의자의 삶과 형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고 파악한다. 한기형, 「노블과 식민지」, 한기형․이혜령 외, 저수하의
시간, 염상섭을 읽다, 소명출판, 2014.
53) 이를테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이었던 조소앙은 그의 한문 문집에서 여성 항
일운동가 남자현을 「女俠南慈賢傳」이라는 글로 소개하고 있다. 한문 지식인이자 황실
유학생 출신인 이 신구 합일의 교양인 조소앙이 傳이라는 전통적 양식을 원용하여, 항
일 운동가를 ‘여협’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한문 문헌은 俠이라는 단어의 정치적 함의가
근대 속에서 어떻게 재맥락화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사례이다.
趙素昻, 「女俠南慈賢傳」, 震光, 1934年 1月(中国杭州)(素昻先生文集 上 三均
學會, 1979, 441~442면.)
268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카와 슌로(押川春浪)의 공이었다. 우연찮게도 이 소환은 ‘무협’이라는 단
어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왜 유협이나 협이 아니라, 무협이 되었는가? 오
시카와 슌로는 1903년 무협의 일본(武侠の日本)이라는 소설을 발표하
였고, 무협세계라는 소년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무라는 단어의 이 새삼
스러운 부상, 혹은 협 앞에 무를 붙인 이 조합은 메이지 이후 서구 제국주
의 열강들 사이에서 근대적 군사국가를 성립시켜나가고 있던 일본이 19세
기 말 20세기 초 가지고 있었던 힘에의 열망과 관련 있을 것이다. 러일전쟁
의 와중에 오시카와가 쓴 소년 모험소설 전시영웅소설 무협함대(戦時英
雄小説 武侠艦隊)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 무협이라는 단어를 건져 올렸
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군인이자 과학자인 주인공이 해저모함을
개발하여 전쟁에서 공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오시카와에게 ‘무
협’이란 제국의 패권주의적 열망에 대한 지지의 한 표현이었다.
19세기 영국의 ‘근육적 기독교’54)와 근대적 의미의 스포츠맨쉽의 출현,
그것의 일본적 수용을 다루고 있는 아베 이쿠오는 ‘야구광’ 오시카와 슌로
와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사이에 벌어진 매우 흥미로운 논쟁을 소개
하고 있다.55) 논쟁의 시작은 1911년 도쿄아사히신문에서 전개된 ‘야구해
독론’에서 비롯되었다. 니토베 이나조 등 교육계 인사들이 참여한 이 야구
비판 캠페인은 곧 격렬한 반론을 맞이하였다. 특히 오시카와 슌로는 니토
54) 근육적 기독교(muscular christianity)는 1857년 킹슬리의 소설 2년간에 대한 희화화
된 표현으로 등장했으며, 같은 해 토마스 휴즈의 톰 브라운의 학교생활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그 실체를 얻게 된다. 1861년 토마스 휴즈는 ‘근육적 기독교인’에 대하
여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예전의 기사도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념을 가지
는 한편, 인간의 육체는 단련과 복종을 위해 주어진 것이자, 약한 자를 돕고 모든 올바른
이유의 진보를 위해 그리고 신이 사람의 아들에게 부여한 속계를 정압하기 위해 사용해
야 한다는 신념을 갖는 것”. 阿部生雄, 近代スポーツマンシップの誕生と成長, 筑波
大学出版会, 2009, 173~175頁. 이 책에서 아베 이쿠오는 근육적 기독교를 근대적 스포
츠맨쉽의 배아로서 파악하고 있다.
55) Ikuo Abe, Muscular Christianity in Japan : The growth of a hybrid,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History of Sport, Vol. 23, 2006, pp.723~728.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69
베 이나조가 야구를 ‘소매치기 유희’라고 한 것에 대해 격분했다. 그는 니
토베가 야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며 인신공격에 가까운 공격을
퍼부었다. “그(니토베-인용자)는 도덕적인 무사도에 대해 쓰고 논해왔을
뿐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왔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니토베의
의견은-인용자) 그 자신의 저열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56)
여기에서 이 논쟁이 일본 야구사에서 지니는 의미, 혹은 근대 미디어와
스포츠 담론의 관계를 논할 생각은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시카와
가 ‘무사도’라는 단어를 통해 니토베의 의견에 반격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
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니토베 이나조는 1900년 영어판 Bushido를 출
판, 대(對)서구를 향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고자 하는가를
알렸다. 이 책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8년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세계주의를 지향했던 퀘이커 교도에게 있어 무사도란 이 책의 부제가 정
확히 보여주고 있는 바(The Soul of Japan) 정신이자, 모럴의 문제였다.
니토베는 서구의 근대 프로테스탄티즘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상정했으며,
기독교적 ‘보편’을 일본의 ‘전통’의 언어 속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다시
이 책이 러일전쟁의 승리라는 자축 무드 속에서 일본어로 ‘번역’되었을
때, 그것은 일본이 어떻게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가를 입
증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11년의 시점에 오시카와가 무사도를 언급할 때, 이 무사도는 니토베
적 무사도와 미묘한 차이를 갖는 것이다. 오시카와에게 있어 이 단어는
아베 이쿠오의 정확한 지적처럼 ‘군인칙유(軍人勅諭)’에서 표현된 바로
그 ‘무사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57)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오시카와는
56) 押川春浪, 「東京日日新聞」 1911年 9月 2日/야구해독론에 맞선 오시카와의 논쟁의
내용은 横田順彌, 熱血児 押川春浪-野球害毒論と新渡戸稲造, 三一書房, 1991를
참조.
57) Ikuo Abe, op.cit., p.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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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이라는 단어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시카와적 무협=무사도
에서 중요한 것은 강건하고 규율 잡힌 신체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국가의
무력에 있었다. 니토베와 오시카와의 서로 다른 ‘무사도’의 함의가 보여는
것은, 서구와 아시아를 향한 이 단어의 절묘한 기능을 보여주고 있는 것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서양을 향해서는 일본이 가지
고 있는 고도의 정신을, 아시아를 향해서는 그 자체로 무력을 전시하는
키워드로서의 그것 말이다.
오시카와의 사례는 왜 일본에서 ‘무협’이라는 단어가 정착되지 않았는
가를 거꾸로 보여준다. 즉, 오시카와적 의미에서 이 단어가 품고 있던 ‘무
력’적 함의는 이미 존재했던 ‘무사도’라는 더 뿌리깊은 단어로 대치가능한
것이며, 그런 한에서 이 단어를 사용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게다가
본래적 의미의 ‘협’, 즉 법을 무로서 범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잠재적으
로 위험한 개념이며, 같은 ‘무’에의 열망과 관련있는 것이라면 무사도는
무협 보다 훨씬 체제 내적인 것이기도 하다. 협의 비분과 의기는 무사도
에서 충성으로 대체된다.
이 사정은 그렇다면 왜 같은 시기 중국에서 ‘무협’이 정착되는가를 보
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일본에서 무력에 상응하는 정신구조
를 무력으로부터 역으로 유추하는 과정, 즉 이미 존재하는 무력을 정당화
하는 것으로서 무사도라는 단어가 선택되어졌다면,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중국에서 힘(武)을 통해 이 상황을 깰 수 있는 ‘협’은 보다 적극적으로
상상될 필요가 있었다.
20세기 초 일본이 동아시아 담론장에서 차지했던 위치는 이 단어의 중
국에서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58) 1915년 서양문학 번역자 林抒는 그의
58) “일본 유학을 경험한 중국의 작가들과 학생들은 중국이 서구 과학의 적용과 무력의
현대화라는 메이지의 예를 따르기를 바라며 이 단어를 그들의 고향으로 가지고 돌아왔
다. 이 단어는 청 말과 민국 초기 이후 중국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9세기,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71
한문 단편소설 傅眉史를 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발표하였다.59)
이 근대 중국 최초의 무협소설 이후 1920년대에 이르러 무협은 중국어
문화권 대중문화의 일반적 이디엄으로 기입되었다. 물론 이 근대 양식 이
전에도 협의소설(俠義小說)이라는 전범이 존재하였다. (조선에는 ‘유협
전(游俠傳)’이라는 양식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연원의 추적이 아니라 ‘무협’이 대중문화의 자원이 된 이 사태야말로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
호’의 존재이다. ‘강호’에서 현실 세계의 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
곳만의 고유한 룰에 의해 이루어진 이 세계야말로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
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1920년대 중국에서 새롭게 발견된 판타지 공간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때때로 이 강호는 현실세계와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궐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1960년대 신파무협편이 만들어지고 있던 당시에도 일본과 한국에서
이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한국의 경우 ‘무협’이라는 단어가 일반
적으로 사용된 것은 역시 1960년대 말 홍콩과 대만의 무협소설과 무협영
화의 번역, 수용의 단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협’만을 보자면, 매우
중요한 두 개의 장르영화 명칭이 존재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일본의 ‘임
협(任俠)영화’와 1960년대 말 등장한 한국의 ‘협객(俠客)영화’가 그것이
다. 물론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이 두 장르는 당연히 서로 다른 역사
적 상상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소비되었다.
당시의 문학은 俠義라는 이름으로 쓰여졌다. 20세기 초 ‘무협’으로의 이동은 일본과
같은 힘을 가진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무력의 기초(武)의 강조라는 근대적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Stephen Teo, op.cit., p.2.
59) 중국에서 최초로 무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04년이다. 1904년 小說叢話에서
定一이 수호전을 논하며 “무협의 모범을 남겨 사회에 그 혜택을 준 것은 실로 施耐庵
의 공이다”라고 쓰고 있다. 중국 무협소설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張贛生,
「舊派武俠小說槪述」 周淸霖, 中國武俠小說名著大觀, 上海書店出版社, 1996,
1~3면.(전형준,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25면에서 재인용)
272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임협영화가 주로 메이지부터 늦어도 쇼와 초기까지를 배경으로 한다면
협객영화는 식민지 시기를 주된 배경으로 하였다. 1960년대의 일본에서
소비되었던 임협영화가 악으로서의 신(新)과 선으로서의 구(舊)라는 대
립 속에서 근대에 대한 낭만적 거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그럼으로써
패전이라는 역사적 치욕으로 끝난 메이지 이후의 근대화에 대한 총체적
인 거부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면, 한국의 협객영화의 주된 대결은 일본
야쿠자와 한국 야쿠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민족간 결투에 관한 것이었다.
당연히도 한국 야쿠자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이 승리를 통해서 식민
지 경험이라는 굴욕적인 역사는 상상적으로 ‘전복’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들은 느슨한 공통점을 가지
고 있었다. 두 영화 모두 ‘야쿠자’가 주인공이고(무로써 법을 어기는 자
협) 이들을 강제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의리이다. 말하자면 의리는 이 범
법자들, 말 그대로 법을 범한 자들의 무리가 하나의 ‘세계’로 구성되기 위
한 구성원리이다. 이 영화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세계와 대비되는 다른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를테면 무협영화에서 강호
는 농민의 세계와 대비되는 것이며, 임협영화에서 야쿠자의 세계는 가타
기(堅気)의 세계와 대비되고, 협객영화에서 그것은 범부의 세계와 대비
된다. 농민, 가타기, 범부에게 적용되는 이곳의 법이 아닌 다른 법, 의리로
구성된 다른 세계라는 점에서 범법자들이 구상한 세계와 ‘강호’는 그리 멀
지 않다. 무로써 법을 범하는 자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세계의 룰-의리에
의해 움직인다. 즉, 협과 의리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임협영화와 협객영
화, 무협영화는 상당 부분 겹친다. 요컨대 무협영화는 ‘협’이라는 오래된
단어, 근대 대중문화 속에서 다시 불려온 이 단어의 의미와 심상을 공유
하는 한에서 동아시아 보편의 형상 혹은 심정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게
다가 전통적으로 ‘협’에 내재되어 있던 정치적 맥락은 일본, 홍콩, 한국이
라는 서로 다른 개별 지역들에 등장하고 있던 새로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73
영화들을 소구토록 만드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산업화 시대의 이 새삼스러운 협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곳의 ‘법’을 범하는 이 신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더 정확히는
이 신체들을 향유하는 자들-관객의 열망은 무엇이었는가? 혹시 그것은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도정 속에 놓인 아시아 남성들의 상상적 전복과 관
련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양강의 신체는 한편으로 더 할 나위 없이 강한
신체에 대한 열망이자 규율과 공장의 기계에 묶인 범속한 신체들이 꿈꾸
는 꿈-판타지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4. 맺으며
“또 하나 뚜렷한 작품경향을 이루고 있는 것이 소위 한중합작무협영화이
다. 지난 한 해에 18편이나 개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작무협영화는 대
개가 저급한 오락활극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대개가 중국무술배우나 연출
에 얹혀서 말하자면 국적불명의 무술영화가 되어 있다. 그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이 모두 황당무계한데도 만화 같은 활극적인 재미가 관객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60)
<대취협>과 <독비도>의 한국에서의 성공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에
서 영화사가 이영일은 ‘소위 한중합작무협영화’가 한국영화의 주류 흥행
장르의 변동과 상관없이 합작무술영화가 1970년대의 가장 꾸준한 인기
장르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61) 종종 재개봉관의 두 편, 혹은 세 편
60) 이영일, 1977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영화진흥공사, 1978, 40면.
61) 실제로 영화연감이 1977년과 1978년의 경우, <얄개전>(석래명)을 기점으로 하이틴영
화가 유행했던 1977년 4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던 한국영화 서른편 중 10편이 하이
틴 영화였으며, 10편이 합작무술영화였다.(1977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영화진흥공사,
1978, 36면.) <겨울여자>(김호선)의 성공으로 호스티스물이 주류를 이루었던 1978년의
274 泮橋語文硏究 제39집
의 동시상영 영화로 보여줬던 이 영화들에 대한 이 지속적인 호응이 의미
하는 바는 무엇인가? 위장합작영화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혹은 이 명
칭이 이미 보여주는 바처럼 한국과 홍콩이라는 네이션의 경계를 가뿐히
넘을 수 있는 이 영화들의 공통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한국과 홍콩(그리
고 홍콩 무협영화가 줄기차게 보여졌던 동남아시아 일대)의 젊은 남성들
은 이 영화들의 무엇에 그토록 탐닉하였는가?
신파무협편은 영화에 있어서 네이션과 네이션을 넘고자 하는 운동 사
이의 긴장과, 로컬과 글로벌이 어떻게 서로에게 긴박되어 있는지를 더 할
나위 없이 명징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1960년대 내내 쇼브
라더스가 고심했던 ‘지구화’ 프로젝트의 산물로서 무협영화는 이전 시기
의 주력 장르였던 쇼브라더스 시대극과 일본 찬바라 영화의 강력한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 즉, 1960년대 중후반 동아시아 전반의 액션영화는 내러
티브와 캐릭터, 도상적 측면에서 그리고 실질적인 인적-물적 자원의 교류
라는 측면에서 활발한 통국가적 교섭을 행하였다. 이 영화-이미지들은
매우 내셔널한 컨텍스트 내에 위치해 있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는 영화산
업의 논리 속에서 초국가적으로 교환되었다.
오래된 ‘협’의 개념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중국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무협의 개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것은 드디어 산업화 시대
에 ‘양강’의 상상력을 얻었다. 무협이 전전 동아시아의 힘에 대한 열망과
저항의 거점을 동시에 의미했다면, ‘양강’의 신체는 힘과 관련된 냉전의
질서와 전혀 무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동아시아 전체의 급격한
산업화와 그 과정에서 열망된 강건한 남성 신체와 관련 있으며 동시에 공
장의 규율 속에 놓인 이 신체들의 상상적 전복과 관계있다.
요컨대 당시의 한국, 홍콩,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협’을 둘러싼
경우, 총 한국영화 제작편수 114편 중 31편이 합작영화였으며, 이중 10편이 5만명 이상
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1978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영화진흥공사, 1979, 46~49면.
양강(陽剛)의 신체, 1960년대 말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흥기 275
액션영화들은 이 정치, 문화적 관념의 공통성이 산업화, 근대화와 관련된
경제적 공통성으로 절합, 이행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이것은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체제 내적인 것으로 계속해서 소환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범하는 것으로서의 ‘협’이 지닌 반체제적 상
상력은 여전히 과거의 문화적 전통을 소환하면서 당대의 세대투쟁, 정치
변혁의 표상들과 연동되고 있었다. 이러한 중층결정들이야말로 동아시아
에 있어서 무협영화를 소구하는 공통의 감각과 시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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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泮橋語文硏究 제39집
Abstract
Male Body and Masculinity, Rising of 1960's Martial Chivalry Films
- Focusing on Chang Cheh's Works
Yi, Young-jae
In the middle of 1960's, Show Brothers started their new film genre, new wave
martial chivalry films. Ho Kŭmchŏn's Come Drink With Me(1966) and Chang
Cheh's one-Armed Swordsman(1967) are representative examples of New Wave
martial arts films, which were the products of an immense globalization strategy
that was forming a distribution channel across Southeast Asia through huge
Chinese diaspora entertainment companies like the Shaw Brothers. South Korean
film industry was influenced deeply by Hong Kong martial arts films at that time.
We can observe a lot of Korean martial chivalry films in result of Hong Kong
Martial chivalry films' success. Why martial chivalry films had a huge success
in Hong Kong, Korea and other asian region? I want to argue what is the
commonness that breed the success. In this paper, I focus on the body of strong
masculinity(陽剛) and the spirit of chivalry(俠) in the relation of industrialization.
【Key words】martial chivalry films, Shaw Brothers, masculinity(陽剛), chivalry(俠),
industrialization, Chang Cheh
논문 투고 : 2015년 3월 2일, 심사 완료 : 4월 13일, 게재 확정 :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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