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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정산 석불사 탐방기

산마루금 2016. 1. 27. 10:50

 

  2015년 6월 14일 부산 금정산에 있는 석불사를 탐방했습니다. 석불사는 금정산 남쪽 망미봉과 상학봉 능선 가운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아래 해발 400m의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암벽 여러개가 병품처럼 둘러쳐 있는 병풍암 바로 아래에 매달리듯 자리잡은 절입니다. 석불사는 병풍암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서 예전에는 병풍사라고 불렀다고 하며, 부산 사람들은 지금도 병풍사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번 석불사 탐방은 금정산 산행을 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석불사는 론리플래닛 등 외국의 가이드북에 소개되어 있으며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리스트에 올라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석불사에 대해 2015년 3월 17일자 부산일보의 '[주경업의 부산에 살다] 금정산 남녘 자락 석불사'의 기사 중 그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이 절에는 모두 29체의 부처와 보살이 조각되어 있어 많은 이가 찾아온다. 대웅전과 칠성각 사이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바위군이 마치 석굴인 양 다가오는데, 암벽 좌우에 네 분의 사천왕이 비로자나불과 약사여래불을 호위하듯 새겨져 있다. 중앙 위치에 십일면관음보살이 정남을 향해 서 있으며 그 윗자리에 미륵불이 좌정한다. 모든 부처와 사천왕이 거대한 암벽 위에 높은 돋을새김을 하고 있으며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석불사는 1930년대 조용선 선사가 그 옛날 만덕동에 있었던 만덕사를 그리워하여 꿈속에서 계시 받았던 곳을 찾아와 이렇듯 대규모 석불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서편 암반 계단을 따라 독성각으로 오르면 긴 암벽에 미륵세계가 펼쳐지는데 남쪽 가장자리엔 월직사자가, 북쪽엔 일직사자가 시립하여 서 있고, 정중앙엔 석가모니불이 연화좌 좌우에 앉아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협시를 받고 있다. 그리고 보살들과 사제들 사이에 8명씩의 나한을 상하로 배치하여 모두 16나한을 새겼으니 도합 21체의 나한상군이 조성되었다. 특히 십일면관음보살의 각기 다른 얼굴 모습이 정교하다. 동편과 서편 암벽에 조각된 사천왕도 그 크기가 445~690㎝에 이르러 사뭇 위엄스럽기까지 하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 왔던 불교 조각 장인 김석담과 박판암이 신상균·원덕문·권정학 등의 현장감독으로 조성한 것이라 주지 스님은 전한다. 비록 경주 남산 마애불들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순박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무뚝뚝하고 경직된 인상적인 모습으로 암벽에 당당히 버티어 선 모습에 참배객들은 위축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끈질긴 염원으로 대작 마애불을 탄생시킨 그 신심만큼은 절대귀의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 탐방일: 2015. 6. 14 (일요일)

◈ 장소: 석불사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1동) 

◈ 날씨: 대체로 흐림. 시계는 나쁨. 


 


▲ 석불사로 올라가는 길의 풍경입니다.


 


▲ 우측으로 종루가 보입니다. 흡사 산성의 망루를 연상케 합니다. 


 


▲ 석불사 입구입니다.


 

 

▲ 석불사 위의 병풍바위를 담아 봅니다.


 

 

▲ 석불사에 들어 섭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종무소입니다. 연이어 대웅전과 칠성각이 위치합니다.


 

 

▲ 우측으로는 종루가 보입니다. 깎아지른 절벽에 다리를 만들어 망루처럼 세워져 있습니다.


▲ 종루를 지난 곳에서 뒤를 돌아 종루를 다시 담아 봅니다.


 


▲ 3층 석탑이 보입니다. 사리탑인 이 석탑은 탑신부의 옥신석에 금강역사를 비롯하여 불상 등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 중 1층 탑신부에 새겨진 금강역사 때문에 석불사가 유명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 1층 탑신부를 가까이서 담아 봅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이 생각나지요? 맞습니다. 몇 년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말춤 원조 석탑'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랐었는데, 바로 이 금강역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탑신에 새겨진 금강역사는 말고삐를 쥐고 있는 것처럼 양 손목을 교차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역사는 오른팔을 들고 반대편 다리를 접은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접한 네티즌들은 '말춤 안무의 원조(?)를 찾았다', '영락없이 싸이를 닮았다'는 등의 반응을 쏟아내었다고 하며 이 사진 때문에 석불사에는 직접 불상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때 사찰 관계자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합니다.


 


▲ 정면 우측에 새겨진 조각상입니다.


 

▲ 작은 종루도 보입니다.


 

 

▲ 대웅전의 풍경입니다. 대웅전 앞이 깎아지른 절벽이라 더 이상 뒤로 가지 못해 대웅전 전체를 한 프레임에 담기가 어렵습니다.


▲ 대웅전 처마 밑에는 수많은 불상이 놓여져 있습니다.


 

 

▲ 대웅전 앞에 멋드러진 석등이 보입니다.


 

 

▲ 석등을 장식하고 있는 동물상이 정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 대웅전 내부의 불상을 담아 봅니다. 참으로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대웅전 바로 옆에는 마애불상군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고 계단 우측으로 칠성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대웅전과 칠성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마애불상군이 나타납니다.  


 


▲ 정면을 담아 봅니다. 십일면관세음보살과 그 위에 미륵불이 보입니다.


 

 

▲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세로로 담아 봅니다. 금방이라도 벽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 관세음보살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2012년 5월 13일자 국제신문에 실린 '주영택이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를 인용해 봅니다.

    "배판수라는 석공이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웃집에서 꼴머슴으로 지내다가 우연히 한 석공을 만나 돌 쪼는 일을 배웠다. 처음에 그는 망두석(望頭石=望柱石)처럼 쉬운 것을 쪼았지만 차츰 실력이 늘면서 마침내 불상 조각에서 꽤 알아주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배판수는 처음 석공 일을 가르쳐주던 스승의 딸을 사랑했다. 스승의 딸 역시 성실한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스승은 고아에 빈털터리인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그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타오르는 열정을 불상 새기는 일에 쏟았다. 그사이 스승의 딸은 부모의 강압에 못 이겨 딴 곳으로 시집을 갔다. 이 절 저 절로 옮겨 다니며 불상을 조각하는 일을 하는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초례청(혼인을 지내는 예식장)으로 걸어가던 처녀의 마지막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던 중 동래에서 큰 불사(佛事)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금정산 석불사 병풍암 암벽에 마애불군(磨崖佛群)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병풍암을 찾았다. 도착해 보니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인 석공들이 각지에서 찾아와 모여 있었고, 석벽에는 거대한 사천왕상이 새겨지고 있었다. 주불인 석가여래도 희미하게 형상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초청받지 못한 뜨내기 석공 배판수는 달빛이 쏟아지는 빈 공사장에 홀로 돌을 베고 누워 얼핏 잠이 들었다. 꿈속에선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던 처녀가 나타나 "나를 저 돌에다가 새겨주세요"라고 호소했다. 배판수는 꿈을 깨고 벌떡 일어나 막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한 부처상을 두 팔로 끌어안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부처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저 석벽에 부처님이 아닌 마음속에 품은 여인을 새기고 싶습니다.' 그는 석벽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빈 자리를 하나 찾아내어 뚫어져라 응시하고는 여인을 새겼다. 그러자 감로병을 들고 천의(天衣)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눈을 반쯤 내리뜨고 빙그레 웃는 모습은 끝없는 고뇌와 삼독(三毒), 즉 탐(貪·욕심) 진(瞋·성냄) 치(癡·어리석음)에 물든 중생의 마음을 씻어주는 자비로운 얼굴이었다. 마애불군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장 빼어난 작품은 배판수의 관세음보살상이었다. 이 보살상은 석벽을 떠나 걸아갈 듯한 생동감과 여체가 지닌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고루 갖춘 보기 드문 걸작품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는 날 배판수는 관세음보살상을 어루만지며 '이제는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다'면서 자신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깨달았다. 1950년에 조성된 석불사 만다라 마애불군에는 한 석공과 여인의 사랑을 승화시킨 진수로 관세음보살상을 새긴 석공의 간절한 마음이 이야기로 전해오고 있다.


 

 


 

 

▲ 십일면관음보살상의 몸통부분과 얼굴 부분을 확대해 봅니다. 십일면관음보살상에 대해 부산일보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일면관음보살의 각기 다른 얼굴 모습이 정교하다. 긴 몸이 섬세하게 표현된 천의(天衣)와 온 몸을 덮고 흐르는 영락(瓔珞)은 정교한 귀걸이, 목걸이 등과 더불어 화려무쌍함을 한층 더하고 있다.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았고 왼손은 정병을 잡아 가슴 앞에 들었는데 손목의 표현과 정병의 입체감이 뛰어나다. 정병에는 활짝핀 한 송이 연꽃이 꽂혔다. 경주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을 빼닮았다. 1949년 신상균이 조각한 것을 1959년 구포 사람 권정학이 11개월에 걸쳐 앞서 조각한 상을 걷어내고 그 위에 다시 개작한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 서편 바위에 새겨진 사천왕과 부처님 상입니다.


 


▲ 동편 바위에 새겨진 사천왕과 부처님 상입니다.


 

 

▲ 동편 바위 윗부분을 담아 봅니다.

 


 

 

▲ 십일면관세음보살상 좌우에는 굴을 만들어 각각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 굴 내부의 부처님을 담아 봅니다.


 


▲ 독성산령각으로 올라가 봅니다.


 


▲ 올라가는 길 왼편 바위에도 불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부처님을 담아 봅니다. 석가모니불이 연화좌에 앉아 좌우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협시를 받고 있습니다.


 



 


▲  보살들과 사제들 사이에는 8명씩의 나한을 상하로 배치하여 모두 16나한을 새겼습니다.


 


▲ 독성산령각의 편액을 담아 봅니다.


 


▲ 산령각에서 내려다 본 마애불상군 광장의 풍경입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칠성각입니다.


 


▲ 산령각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사천왕상입니다.


 


▲ 산령각에세 우측으로 보이는 나한상을 담아 봅니다.


▲ 석불사에서 바라 본 만덕터널 방향의 풍경입니다. 날씨만 좋다면 조망이 정말 뛰어날 것 같은 자리매김입니다.


 


▲ 멀리 황령산도 조망됩니다.


 


▲ 바위틈에서 사람주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 사람주나무를 확대해 보며 석불사 탐방을 종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