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전남 해남에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머슴인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해오고 풀을 베는 일로 가난한 살림을 도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학교에 다니고 싶어졌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며칠씩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편지 한 장을 썼다.
‘하나님 전상서’ 편지 교회에 배달
“하나님,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세요.”
소년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가난한 집안 형편을 적었다. 편지봉투 앞면엔 ‘하나님 전상서’라고 쓰고 뒷면엔 자기 이름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소년의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은 어디다 편지를 배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심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했으니 교회에 갖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해남읍내 교회 이준목 목사에게 전해주었다. 함석헌 선생의 제자인 이 목사는 당시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 분으로 소년의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소년을 불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살게 하고 과수원 일을 돕게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한신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엔 고향에서 목회자로 일하다가 스위스 바젤대로 유학을 가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엔 총장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소년이 바로 오영석 전 한신대 총장이다.
오 총장의 이 일화에서 내가 주목한 분은 진학의 길을 열어준 이 목사가 아니라 무명의 집배원이다. 수신인이 ‘하나님’인 편지를 교회에 전해준 집배원이 오늘의 오 총장을 있게 했다고 생각된다. 만일 집배원이 “뭐 이런 편지가 다 있어. 장난을 쳐도 유분수지” 하고 편지를 내동댕이쳐 버렸다면 소년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소년은 그렇게 편지를 쓴다고 해서 하나님이 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그렇게 나타내본 것일 뿐 그 편지로 인해 진학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년에게 그 길이 열린 것이다. 그것은 집배원이 자기에게 주어진 우편배달의 역할과 직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어처구니없는 편지를 찢어 버렸다고 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을 텐데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물론 집배원도 편지를 교회에 전달하면서 소년에게 진학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소년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처럼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