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금
방씨부인전(縱) 본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方氏夫人傳
- 저자 : 여강 최재효
마지막회
“이보시게 사위, 내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동안 자네를 가만
히 지켜보니 자네 근골이나 몸놀림이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한 여느 무사 못지않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 문과를 그만두고 무과로 전향하는 게 어떻겠는가? 내 일전에
한양에 갔을 때 벗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네. 지금 명나라와 각을 세우고 있는 여진
족들이 장차 중원中原을 통일할 거란 소문이 있어. 여진족이라면 전에 금나라를 세
우고 오랫동안 만주일대와 중원 그리고 몽고 일부 까지 지배했던 족속들 아닌가?
조선의 상국인 명나라가 지는 해라면 아직 나라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여진
부족들이 떠오르는 해라는 거야. 여진 부족도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 등 여럿
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데 그 중 건주여진 부족이 가장 강력하여 족장인 애신각라기
오창가(愛新覺羅覺昌安)가 머지않아 여진의 모든 부족들을 통일하고 중원뿐만 아니
라 조선과 왜나라 그리고 안남(安南)까지 모두 복속시킬 거라고 하더군.
조선이 지금처럼 파당을 하여 서로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저들이 만약 중원을
통일하고 북방의 패자(覇者)가 된다면 이 조선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라는 거야.
문약에 빠진 문관 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장검을 들고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게 장부의 도리 아닌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지 이백년이 되었네.
지나간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나라를 건국하고 이백년 쯤 흐르면 반드시 커다란
변란이 생기더군. 물론 천년만년 태평성대가 지속된다면야 오죽 좋겠는가? 그 뿐이
아닐세. 왜나라를 다녀온 인사들에 의하면 왜는 지금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쇼군이 정적들을 제압하고 왜나라 전역을 거의 다 통일하고 있다는데, 문제는 그가
왜를 완전히 통일시킨 후에 벌어질 일이네.
그의 편에 서서 혁혁한 공을 세운 다이묘(大名)들에게 줄 영지가 부족할 뿐만 아니
라, 통일하고 남은 힘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벌써부터 조정이나 명국에서 촉
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하네. 예전에 동고 대감이나 자네의 무인기질을 잘 아는 사
람들이 하나같이 자네는 무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거야. 자네가 유년 시절부터 무
예를 즐기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리를 이끄는 뛰어난 자질이 있어 문(文) 보다 무
(武)를 숭상하면 반드시 크게 쓰일 재목이라고 하더군.
어떤가? 만약 나라가 백척간두 위기에 처했을 때 붓만 잡고서 조국을 침범해 오는
외적을 보고만 있을 텐가? 내가 지도하는 청년들도 예전과 인식이 많이 변해서 꼭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 벼슬을 하는 것 보다 장부답게 준마를 달려 삼천리강산을 주
름잡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네.” 방진은 데릴사위로 맞이한 이순신이
매일 방에 들어 앉아 사서삼경이나 들추며 문약에 빠진 모습을 보이자 가슴이 답답
했다.
“장인어른 말씀 잘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덕수이씨 가문에서 배출한 인
재들은 조선건국 이래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 또한 어려
서부터 정진하여 장차 문과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하여 입신양명을 꿈꿔왔습니다.
물론 나라가 있어야 가문이 있고, 개인의 영달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갑작스러
운 장인어른 말씀에 저 역시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수십 년간 준비해온 과거를 하루아침에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듯 합니다. 우선 제가 제 자신을 이해시켜야 하고 아버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벗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의 권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 장인어른이 유성룡과 같은 말씀을 하시고 있다. 또한 몇 해 전 내가 선거이
와 홍연해 등 벗들과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 홀연히 나타나 나에게 계시하
던 그 도인과도 같은 이야기를 하시니 장차 이를 어쩐다. 내가 장인어른 말씀대로
문과를 버리고 무과로 전향하여 과거준비를 한다면 아버님과 어머님, 형제들 그
리고 주변에서 과연 뭐라고 말을 할까. 무예에 능한 사람을 장인으로 두더니 마음
까지 바꾸었다고 손가락질 하거나 욕을 하겠지.
그러나 나의 어릴 때부터 꿈은 장군이 아니고 이준경 대감과 같이 모든 조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의정부 수장이자 만인지상인 영의정 아닌가?’ 이순신은 장
인 방진의 간곡한 권유를 듣고 몇날 며칠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낭군이 끼니
도 거른 채 방에 들어 앉아 두문불출하는 모습에 연꽃아씨는 애가 탔다.
“서방님, 불안해요. 장터를 나가거나 먼데서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머지
않아 조선이 불바다가 될 수 있다고 해요. 왜나라 아니면 북방 여진 오랑캐들이
조선을 집어 삼킬 거라고 해요. 그리되면 곧 태어날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해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는 느낌 이예요. 얼마 전, 아버님께서 서방님
에게 무과로 전향하라고 권유하셨잖아요?
여인네 좁은 소견으로 보아도 아버님 말씀이 옳은 것도 같아요. 저 역시 서방님
이 장차 태어날 우리 아이들과 덕수이씨와 상주방씨의 명예를 위하여 무과로 전
향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옛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잘 아시
잖아요. 물론 서방님은 바보온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요. 그 두 분은 고구려가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 앞장서서 조국을 구하여 유방백세(流芳百世)하는 아름다
운 전설을 남겼잖아요.
한 나라가 세워지고 망하는 것 역시 칼과 창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봐요. 아버
님은 전라도 보성군수를 역임하셨지만 서방님도 아시다 시피 무인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세요. 아버님 말씀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깊이 혜량하세요. 나라와
두 가문의 앞날을 생각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저는 서방님이 문약에 빠진 허약한 벼슬아치보다 관우처럼 적토마를 타고 청룡
언월도(靑龍偃月刀)를 휘두르면서 북으로 오랑캐를 제압하고 남으로 왜놈들을 숨
죽이게 하는 조선 제일의 명장(名將)이 되는 게 소원입니다. 서방님, 저의 청을 뿌
리치지 마세요. 제가 딸을 낳으면 왕후로 키울 것이며, 사내라면 조조나 유비같
이 일세를 풍미하는 대장부로 키우고 싶어요.
그러나 그 모든 기적은 자신을 바르게 비출 수 있는 맑은 거울이 있듯이 우리
아이들의 거울은 서방님이세요. 서방님이 웃전에 아부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고
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과 교류하며 잘난 양반행세나 하며, 일신의 부귀영화
만을 쫓는 보잘 것 없는 벼슬아치로 사는 것이 저는 싫습니다.
아버님이 서방님에게 무과를 권하신 것도 당신께서 이미 많은 생각을 하시고
당신과 친분이 깊은 한양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신 후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결코 아버님의 생각만은 아닐 겁니다. 아버님이 평
생 무인의 길을 걸어오셨기 때문에 서방님에게 같은 길을 가시라고 하는 뜻에서
하신 말씀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서방님, 저는 금방이라도 서방님께서 벼락출세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인고의 세월 동안 묵묵히 힘을 기르시다가 나라가 부르거나 서방님이 필요하신
곳에 가시어 정의의 깃발을 휘날리며 뜻을 펼치면 여한이 없을 거예요. 요즘 저
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있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새
카만 쥐들이 몰려와 조선의 남녘바다를 뒤덮으며 바닷물을 모두 마시고 조선의
강토를 갉아먹는데 차마 그 처참한 광경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자다가 놀라 몇 번을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두렵습니다. 그 쥐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서방님이 쫓아주세요. 너무 불길하여 서방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답니다. 또 언제는 시커먼 호마(胡馬) 때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금수강산을
짓밟는 무서운 꿈을 꾼 적도 있었어요. 어째서 임신한 이후로 제가 그 같은 흉몽
을 자꾸 꾸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서방님은 저 뿐만 아니라 장차 태어날 우리
아이들 그리고 상주방씨, 덕수이씨 더 나아가 강산의 모든 백성 모두를 보듬어
안아주시고 보살펴 주셔야 해요.
그리하시려면 붓도 좋지만 금강역사 같은 힘과 담력이 있어야 할 거예요.
저는 훗날 태어날 우리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서방님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
들에게 세세손손 서방님의 아르다운 이름을 잇게 하고 싶습니다. 서방님, 부디,
부디 심사숙고 하시어 아버님과 저에게 미소 지을 수 있게 해주세요.” 연꽃아
씨는 낭군에게 지어미로서 또 친정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하는 딸로서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아니야. 안 돼. 누가 뭐라고 하여도 내 뜻을 바꿀 수 없어. 내가 뜻을 바꾸면 덕
수이씨 문중에서 내가 방씨네 데릴사위가 되더니 성까지 바꿨다고 비아냥댈 거
야. 비아냥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내 꿈이 문과에 응시해 장원급
제를 하는 거 였어. 절대 안 돼. 절대로......, 그렇지만 나를 믿고 의지하는 아내
와 방씨가문의 사람들 뜻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어찌하나......’
청년 이순신은 또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한양으로 올라와 벗들을 만났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운종가(雲從街) 피맛골에서 유성룡, 서철(徐徹), 선거이, 홍연해를 만
나 회포를 풀기로 했다. 청년 이순신은 방씨가문의 데릴사위가 되고 거의 일 년
이 넘도록 한양의 벗들을 만나지 못했다.
“여해, 장가들더니 사람이 변했으이. 벗들을 나 몰라라 하니 말이야.
하하하하......” 선거이가 주점에 들더니 이순신을 얼싸안고 반가워하였다. 뒤이
어 홍연해가 주점에 들어서더니 두 팔을 번쩍 들어 이순신을 오락 끌어안았다.
“여해, 반갑네. 늦었지만 축하 하네. 지난해 여름 자네 혼인식 때 가보지 못했네.
그때 영의정 이준경 대감을 비롯하여 한양에서 제법 방귀깨나 뀌는 자들이 대거
아산으로 몰려갔다고 들었네. 한양의 대갓집 자제 혼례식에도 그렇게 많은 고관
들이 몰리는 일은 드물걸 세. 참으로 부러우이.” 홍연해는 정말로 섭섭한 표정까
지 지으며 웃었다.
“미안하이. 내 미처 겨를이 없었네. 아산에서 혼례를 치르다 보니 자네들을 아
산까지 내려오라고 하기가 뭐해 내 알리지 않았네.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네. 대
신 오늘 술값은 내가 치름세.” 이순신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탁주가 한 주전자
비워갈 무렵 서애 유성룡이 귀공자풍의 한 사내와 주점에 나타났다.
“이 사람, 여해, 왔구먼. 내 그동안 자네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시는가?
하하 하하하......” 유성룡이 이순신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미안하이. 이견(李見), 자네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는 소식은 들었네. 정말로 축
하하이” 이순신이 유성룡과 인사를 마치자 뒤에 서있던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이런, 내 정신을 봤나. 이보시게 여해, 인사하시게. 태조 이성계께서 조선을 건
국한 이래 과거에 아홉 번 응시하여 아홉 번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리
는 예조좌랑 율곡 이이님을 내가 일부러 모시고 왔네.” 유성룡의 말에 그제야 이
순신은 이이를 자세히 보았다.
“율곡 이이라 합니다. 여해 공은 이 사람과 같은 덕수이씨가 아닙니까? 항렬로
보면 공께서 이 사람보다 위에 계십니다.” 조정에서 정6품의 벼슬을 하는 이이는
조용하면서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오래 전에 문중 행사 때
이이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이순신 보다 여덟 살 위인 율곡 이이는 나이가 어린
이순신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다해 이순신을 대하였다.
“너무 오래 전에 뵙고 다시 뵙다보니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 역시
이이와 비록 같은 덕수이씨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조정에 출사하는 율곡 이
이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순신과 이이는 같은 시조를 두었다. 덕수이씨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신호위중
랑장(神虎衛中郞將) 벼슬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인데 그의 손자로 충렬왕 때 통정대
부 지삼사사知(三司事)를 역임한 이소(李?)의 맏아들 윤운(允?)이 부원군파(府院君
派) 파조(派祖)가 되고, 둘째아들 윤번(允蕃)이 정정공파(貞靖公派)의 파조가 된다. 이
순신은 정정공파 계열로 12세손이며, 이이는 부원군파 계열로 13세손이 되니 이
순신이 비록 이이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항렬로 위가 되었다.
이순신이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자 서애 유성룡은 예전에 말한 것 처럼 이순신이
당연히 무과에 응시하여 무인의 길을 걷는 게 좋다고 강권하였고, 선거이와 홍연해
는 금강산에서 한 도인이 한 말을 상기시키며 함께 무인의 길을 걷자고 강력히 권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벗들의 이야기를 듣기만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자코 탁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좌중의 이야기를 말없이 경청하던 예조좌랑 이이
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술자리에서 가장 연령이 많고 조정에 출사한 경력도
꽤 되어 그의 이야기는 다른 벗의 이야기 보다 무게가 있어 보였다.
“여해공께서 문과에 응하시던 무과에 응하시던 전적으로 여해공 의중에 달
렸습니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 역시 여러분들 의견
과 동일합니다. 지금 왜나라 기류가 심상치 않으며 중원을 놓고 명나라와 힘겨
루기를 하는 건주여진 또한 우리 조선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지금의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지리멸렬되어 정신들이 없습니다. 이럴 때 저들
중 패자가 되어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범한다면 정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습
니다. 적어도 조선에서는 십만 이상의 정병을 양성해야 합니다.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대부분 문과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문과
로 등용되어 조정에 출사하는 몸이라 할 말은 없습니다만, 나라의 앞날을 생각
하면 아찔합니다. 위로 대륙 오랑캐가 있고 아래로 열도에 왜적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여해공께서 여타 사대부 자제들처럼 문과에 호감을 두시는 것
보다 상무(尙武)에 전력투구 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우리 덕수이씨 문중에서도 이제는 문관보다 걸출한 절도사나 병마사 또는 통제
사 같은 호걸이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사람이 관상을 좀 볼 줄 압니
다. 여해공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 나신 듯 보입니다. 아무리 까마귀 무리에
섞여 있어도 백로는 금방 눈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여해공은 낭중지추가 분명합니다. 송곳은 주머니에 감출 수 없습니다. 여해공
께서 이 사람과 여러 벗님들의 의견을 깊이 새기셨으면 합니다.” 율곡 이이의 달
변은 이순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아아, 어쩌나. 장인어른과 아내뿐만 아니라 벗들조차도 내가 무인의 길을 걷기
를 권하니 그들 의사를 무시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북에서 여진족이 흥기하
고 있으며 왜에서도 오다노부나가라는 쇼군이 전국을 통일하여 그 세를 몰아 조
선을 침략한다면 조선은 꼼짝없이 금수강산이 피바다가 될 터인데.
주변의 권유를뿌리치고 나 혼자만 문과를 고집하다가 훗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지금의 우리가문의 여러 가지 상태로 보아 내가 무과에 급제해 조정
에 출사하는 편이 좋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꿈꿔왔던 뜻을 꺾어야 하다니 마음이
아프다.
그래, 좋다. 내가 유년시절 병정놀이를 즐겼고, 장인어른이나 금강산에서
만난 도인 말씀대로 내가 무골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법, 무너진 가세를 키우고 가문을 빛내는 방법이 어쩌면 문방의 길을 걷기
보다는 무인이 되는 것이 빠를지도 모를 일이지.
덕수이씨 시조이신 이돈수 할아버지께서도 중랑장이란 무관의 벼슬을 하셨으
니 우리 덕수이씨 가문은 근본이 무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어. 어쩌면
나는 무인의 길을 걷지 않으면 출세를 못할지도 몰라. 좋아, 아내의 간곡한 부탁
을 들어주자.' 이순신은 마음의 짐을 훌훌 털고 일어났다.
한양에 갔다 열흘 만에 아산에 돌아온 이순신은 곧 바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를 만나서 그동안 심사숙고하고 고민하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처음에는 아
들이 문과를 포기하고 무과를 위하여 무예를 연마하겠다고 하자 이순신의 아버
지와 어머니는 크게 놀라는 안색이었다.
아버지 이정은 한참 동안 앞마당에 나가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히
고 다시 사랑채로 들었다. 어머니 변씨 역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다 아들의 얼
굴을 보고 아무 말 없이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네 나이가 벌써 스물 둘이다.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지금까지 준비해온 문
과 공부를 포기하고 정녕 무과에 응시하겠다면 그렇게 해라. 네가 서너 살 때, 한
스님이 탁발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네가 툇마루에서 잠든 모습을 보고 그러
더구나. ‘저 아이는 장차 큰 칼로 산하를 편안케 할 인물이니 훗날 아이가 자라거
든 저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뜻을 존중해 주고 뒷받침만 잘하라’고 말이다.
그래라. 네가 무인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리하여라. 이 아비는 문(文)이든 무(武)
든 나라의 기둥이 되고 우리 덕수이씨 가문을 빛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아들 이순신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힘찬 어조로 힘을 실
어 주었다. 어머니 변씨는 아들의 뜻을 반대할 줄 알았던 남편의 의외의 말에 안
도하는 눈치였다. 뱀골로 돌아온 이순신은 부인에게 그간의 고민과 결심을 이야
기 하였다.
“서방님, 감축 드립니다. 정말로 잘 생각하셨어요. 오늘의 결정은 결코 후회가
없을 거예요. 정말로 고마워요.” 연꽃아씨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가슴이 울렁거
리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부인을 위해서요. 부인의 간곡한 청이 없었더라면 나는 문과에서
절대로 무과로 전향하지 않았을 거요. 앞으로 우리 부부에게 예상치 못한 혹독
한 시련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한 그 어느 사악
한 기운도 우리의 연분을 해치지 못할 거요. 부인 고맙소.” 이순신은 감격에 겨
워 가늘게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아내를 살며시 감싸 안아주었다.
“그래, 정말로 잘 생각하였네. 어쩌면, 자네 양 어깨에 조선의 운명이 걸렸을
지도 모르겠어. 참으로 잘 생각하였어. 내일부터 당장 집 앞 넓은 야산에 활터
를 만들고 마장(馬場)을 세워 자네가 무예연마에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내 손수
발 벗고 나서야 겠네. 그리고 검법에 능한 내 동무를 초빙하여 내 집에서 먹이
고 재울 계획이네.
자네는 오로지 병법 공부와 무예 연마에 혼신의 힘을 쏟도록 하시게. 정말로
고맙네. 고마워.” 방진 역시 사위 이순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어찌하나 걱정하면서 자신과 딸 그리고 상주방씨 가문의 앞날을 그려보고 있
었다. 사위 이순신이 무과로 전향하자 방진은 자연스럽게 무예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무과시험은 보통 식년 문과와 같이 초시, 복시, 전시 3단계의 시험이 있는데
초시는 전년도 가을에 치르고,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시행하였다. 초시는
향시, 원시(院試)가 있는데 향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였다. 각 도마
다 선발인원 숫자가 정해지는데 훈련원 70인, 경상 30인, 충청·전라 각 25인,
강원·황해·평안·함경 각 10인 등 모두 190명을 선발했다.
병조에서 식년 봄에 초시 입격자를 한양으로 불러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하는
강서와 무예를 시험을 보게 하여 총 28명을 선발했다. 이때 전시에서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의 등급을 정했다. 무과의 고시과목 중 강서는 복시에만
있었는데, 4서5경 가운데 택일하고, 무경7서에서 택일하였으며, 통감, 병요,
장감(將鑑), 박의(博議), 장감(將鑑), 무경, 소학 중에서 택일하도록 하였다.
아울러서 경국대전과 함께 고강하도록 했다. 무예에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 기창(旗槍), 격구 등 6기(六技)가 있다. 식년무과 이외에 비정규적
으로 실시하는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정시(庭試), 관재시(觀才試) 등이 있다. 방진
과 사위 이순신은 일심으로 무과를 향한 부단한 노력을 이어갔다.
“아버님, 서방님, 잠시 목 좀 추기시고 하세요.” 아늑한 방화산(芳華山) 기슭
아래 설치된 이순신을 위한 치마장(馳馬場)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순신은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며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장인 방진은 역시 말을 타
고 사위와 함께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백발백중이었다.
두 사람이 말을 달릴 때마다 뽀얀 먼지가 일었다. 연꽃아씨는 불룩해진 배
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홍씨와 같이 냉수를 가지고 와서 연습 장면을 지켜보
았다.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햇볕에 까맣게 탄 채 구슬땀을 흘리는 낭군
이 안쓰러운지 연꽃아씨는 연신 이순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대로만 꾸준히 연습하면 머지않아 기마 자세는 틀이 잡힐 걸세. 서서 쏘
는 활보다 달리는 말 위에서 쏘는 기사가 훨씬 어렵네. 자네 활솜씨는 배운
지 얼마안 되었지만 장차 조선의 명궁(名弓) 반열에 오를 것이네. 검법과 창술
도 어지간히 익혔으니 이제부터 한 단계 격을 높여 매진해야 할 걸세.” 방진
은 냉수 그릇을 사위에게 건네며 흡족해 했다.
“모두가 장인어른 덕분입니다. 주경야독하는 각오로 정진하겠습니다.”
“서방님, 안돼요. 그러시다가 병이라도 얻으시면 어쩌시려고요.” 연꽃아씨
가 손사래를 치며 곧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토끼눈을 하였다.
“하하하하......, 염려하지 말거라. 이 서방은 무골의 신체를 타고나서 웬만
한 고난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단다.” 방진은 딸의 말에 호쾌하게 웃었고 어
머니 홍씨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 서방, 밤낮으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이 아이도 예뻐해 주시게. 곧 산
달이 돌아오니 많이 힘들게야. 여인네는 낭군의 작은 관심과 사랑에 울고
웃고 하는 거라네.” 장모 홍씨는 이순신의 까맣게 탄 모습이 안타까우면서
도 부부의 정이 우선이라는 점을 은연 중 강조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이순신이 23세 살 되는 해에 연꽃아씨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회라 하였다.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마치 피를 나눈 부자지간 같아서 마
을 사람들은 두 사람 관계를 몹시 부러워하였다.
한양에서 이순신과 함께 수학하던 벗들이 종종 내려와 이순신의 무예 공부
에 대한 열정에 탄복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이순신이 27살
되는 해에 연꽃아씨는 차남을 낳았고 이름을 울(蔚)이라 하였다. 셋째아들의
둘째 손자까지 본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이듬해 조정에서 부여하는 종6품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제수 받았다.
조선 선조(宣祖) 5년 4월 이순신은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28세의 나이로 무
과 별시에 응시하였다, 처음 응시한 과거시험을 치르는 중에 낙마하여 그만
왼쪽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러나 연꽃아씨
와 장인 방진은 크게 낙심하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이순신을 위
로하며 재기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말로 용기를 주었다.
“서방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한번 실패는 더 큰 성공을 위한 좋은 경험이
라 할 수 있어요. 저와 아버님은 서방님의 이번 과거 시험 실패에 대하여 아무
렇지도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낙마로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
다. 서방님 나이에 비해 늦은 과거응시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
습니다.
그 옛날 주(周)나라 강태공께서는 때를 보며 낚시로 세월을 보내다 일흔두 살
에 주문왕(周文王)에게 발탁되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통일 왕조를 세우
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천세만세에 그 이름을 청사에 길이 빛내고 있습니다.
서방님 곁에는 제가 있고 우리 아이들이 있습니다. 힘을 내세요. 십년 아니라
백년이 흘러가도 저는 서방님 곁에서 뒷바라지 할 겁니다. 언젠가는 서방님의
이름 석 자가 조선 천지 모든 백성들 입에서 찬양하는 날이 꼭 올 거라 믿어요.”
연꽃아씨는 무과시험에서 낙방하여 상심해 있는 이순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부인, 고맙소. 장인어른과 부인 볼 면목이 없소. 부인 말씀대로 내 다음 과거
에서 반드시 급제하리다. 힘들고 괴롭더라도 나를 믿고 응원해주오.” 이순신은
연꽃아씨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순신의 동문수학한 벗들이 거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이순신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세월이 아쉬
웠다. 아버지와 형제들 볼 면목이 없어 잠시 아버지 어머니를 찾지 않기로 하고
다시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다.
명종 임금이 붕어하고 중종(中宗)의 후궁이었던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손자 하성
군(河城君) 이균(李鈞)이 조선의 새로운 지존이 된지 9년째 되는 해 2월에 이순신
은 32살의 나이로 식년 무과에 당당히 급제하였다. 처음 치렀던 별과와는 다른
조정에서 3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는 식년무과였다.
무과합격자는 모두 29명이었는데, 이순신은 병과 4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우수한 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 대부분이 오래전부터
기마술을 반복 훈련한 현직 병사들이었다. 보인(保人) 신분으로 사가(私家)에서 무
예를 연마하였던 이순신으로서는 나름 좋은 성적이었다. 장인 방진의 조력과
연꽃아씨의 뒷바라지와 함께 이순신의 부단한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서애 유성룡은 정5품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율곡 이이는 사간원의 으뜸인
정3품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순신의 부친 이정도 무관의 벼슬인 종5품 창신교
위(彰信校尉)에 제수되는 등 이순신의 주변은 온통 희소식만 있었다. 방진은 사
위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상주방씨와 덕수이씨 그리고 이순신의 외가인 초계변씨 문중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또한 방진과 친분이 있는 한양과 아산의 벼슬아치들이 대거 뱀골로 몰
려들어 상주방씨와 덕수이씨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였다.
“부인, 고맙소. 오늘의 이 영광은 오로지 부인의 헌신적인 뒷받침 결과요.
내가 만약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낱 보잘 것 없는 문관의 길을 걸으며, 파
당을 만들고 부귀영화만을 탐하는 모리배가 되었을지도 모르오. 정말 고마워요.
지난 십년 동안 묵묵히 인내해 가며 이 못난 지아비를 뒷바라지 하고 두 아들까
지 낳았으니 부인의 공덕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내가 먼 훗날 저승에
들더라고 부인을 은애하리다.” 이순신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 모든 게 서방님께서 피땀 흘린 노력의 결과입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어
요. 이제 조정에 출사하시게 되었으니 머지않아 서방님께서 북벌남정(北伐南征)
하시며 조선을 만세반석에 올려놓으실 거라 믿어요. 서방님, 고마워요.” 삼일동
안 이어진 축하 잔치가 끝나자 이순신은 마치 이슬을 머금고 핀 한 송이 연꽃처
럼 고운 연꽃아씨를 꼭 껴안아 주었다.
- 끝 -
_()_ 그 동안 청년 이순신이 부인 방씨를 만나 혼인하고 무과로 전향하여 무인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읽어 주신 임에게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본 소설에 약간의 오류가 발견 되어
내년도 저의 제2 소설잡에 실릴 때 바로 잡아 최종 탈고 하겠습니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조선 중기 임진왜란 발발 시기에 생존했던 인물들입니다. 당초 중편으로 플롯
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마지막회에 급히 끝맺은 느낌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장편으로
엮어볼 생각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곧 다른 작품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12.11일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여강재에서 여강 최재효 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산소 우측에 서 있는 묘비
이충무공 (산소를 등지고 우측)과 부인 상주방씨(좌측)와의 합장묘
2012.10.14일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 이충무공 내외분 합장 산소를 찾아 소설
[방씨부인전] 완성을 고하며, 제사를 지냈습니다. 행여 본인의 불찰로 두 분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용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제를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참작參酌하는 필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내외분에게 절하는 필자
방씨부인전 원고를 상석에 올렸습니다
준비가 너무 소홀하여 송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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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전사 후에 부인 방씨에게 정경부인을 제수하는 교지
둘째 아들은 당초 울이라 지었다가 나중에 열로 개명하였다.
무과 과거에 병과 제4위 합격을 알리는 교지
이순신 장군이 방씨 부인과 혼인하여 과거에 합격 할 때 까지 살던 집 - 현충사 경내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오른 이순신 장군의 아버지 이정(李貞)
정경부인 첩지를 받은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변씨
충무공 부모 형제 산소는 이충무공 산소 좌측 어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좌측이 충무공의 아버님 이정의 묘 / 우측이 어머니 초계변씨 묘
이순신 장군의 큰형 이희신 - 사후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제수 받았다.
이순신 장군의 둘째형 이요신 - 사후 가선대부와 호조참판을 제수 받았다.
이순신 장군의 동생 - 이우신 부부의 묘. 참봉을 지냈다.
2012년 9월 중순 이순신 장군 산소를 찾아가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비를 맞으며 벌초를 하던 덕수이씨 종중회 총무이신
이종흥님을 만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 후손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측이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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