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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어린 왕자

산마루금 2015. 12. 25. 21:04

조종사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어린 왕자’
 

#마크 오스본 감독, 21세기 버전으로 각색

#할아버지가 된 조종사와 만나게 된 소녀

#현대 배경으로 B612와 다른 세계로 여행

1943년 프랑스의 비행사이자 작가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발표한 소설 ‘어린 왕자’의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원작 그대로가 아니라 배경을 현대로 가져왔다. 현대의 인물이 어린 왕자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원작은 어느 사막 한가운데에 불시착한 파일럿이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나 듣게 되는 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현대의 소녀가 할아버지가 된 파일럿으로부터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액자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신비로운 원작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기대 또한 배반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원작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의 나라 프랑스에서 자본을 댔지만, 미국 제작진이 만들고 할리우드 배우들이 더빙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적 감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현대 관객에게 호소하는 대중성을 잘 살려낸다. 감독은 ‘쿵푸팬더’(2008)를 만든 마크 오스본이다.

친구 하나 없이 엄마가 짜놓은 인생계획표대로만 살던 소녀는 어느 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옆집의 괴짜 조종사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오래전 조종사가 사막에 추락했을 때 만난, 다른 행성에서 온 어린 왕자의 존재를 알게 된다. 소녀는 조종사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어가면서 어린 왕자가 살던 소행성 B612와 다른 세계로의 여행, 모두를 꿈꾸게 하는 가슴 벅찬 모험을 시작한다.

소녀가 사는 현대는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어린 왕자 이야기 장면은 스톱모션으로 구현되었다. 네모 각진 집과 거리로 구성된 소녀의 공간과 달리, 이야기 속 어린 왕자의 공간은 아련하고 따뜻한 종이 질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각거림이 느껴지는 스톱모션 연출은 외롭지만 속 깊은 어린 왕자의 내면을 진실하게 전달한다.

소녀는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성공을 바라며 늘 바쁘게 살아가는 싱글맘의 빽빽한 계획에 맞추어 일단은 영재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성공을 향한 발걸음으로 여기는, 현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다. 모든 것이 미리 짜인 답안에 맞추어 이루어지고 있어,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못해 허둥댄다. 그럴 때면 더욱 많은 예상 질문지를 준비해야 하고, 더욱 더 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문제를 풀어야 한다. 입고 있는 옷도, 살고 있는 공간도 온통 회색빛에 네모 반듯하게 정돈된 길과 건물을 오가는 현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또한 몹시도 슬프다.

그런 소녀가 낡은 집에서 고철 더미를 놓고 씨름을 벌이는 엉뚱한 할아버지와 만나게 되며, 삶의 또 다른 면을 깨우치게 된다. 그에게 생활의 시간표란 없다. 희한한 상상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고, 별을 보고,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가 하는 짓은 인생에 쓸데없는 짓인 것 같지만, 소녀의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소녀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규율을 어기게 되며, 법규를 어기고 이상한 모험에 나선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처럼 보이지만 원작은 풍자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혼자 사는 별에서 군림하는 왕이나 흑백 논리 신봉자 등의 인물들이 나오고, 많은 명대사들은 세상을 읽는 지혜의 언어이다. 이 작품 안에서 펼쳐지는 거짓말, 규율 위반, 불법 행위는 세상을 풍자하기 위한 요소가 된다. 혹은 이러한 위반이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이상한 역설에 빠져들지만, 성숙한 인간으로 한 걸음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으로 보인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소녀는 어른이 된 어린 왕자를 찾아 나선다. 놀랍게도 현대 생활의 표준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어린 왕자는 우리 어른들 모두의 모습이다. 하루에 44번 석양의 노을을 감상하던 아이는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해 지는 사막과 마르고 뾰족한 바위산, 사막여우, 뱀, 그리고 장미와 별이 가슴속에 내려앉는다.

2015년을 마지막으로 보내야 하는 연말,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의 가슴에 따뜻한 불꽃을 던지는 작품이다. 밤하늘의 별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위하여!

정민아 영화평론가·한신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