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금
데뷔작으로 인생영화 만든 한국영화감독 본문
지금은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 중에도 다시 보기 부끄러운 첫 작품을 만든 사람도 많다. 그만큼 데뷔작은 처음 영화를 만드는 부담감과 제작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도 잦다. 그럼에도 데뷔작부터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이며 흥행에 성공하거나,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드는 감독도 있다. 가까운 예로 김보라 감독은 작년에 데뷔작 [벌새]로 ‘올해의 독립영화’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이상근 감독의 첫 작품 [엑시트]는 무려 900만 관객을 모으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데뷔작에서 걸작을 만들어 차기작이 기대되거나 지금도 꾸준히 좋은 작품을 연출하는 한국영화감독들을 살펴본다.
이정향 감독은 한국영화 아카데미 출신으로 [미술관 옆 동물원]이 데뷔작이다. 결혼 비디오 촬영기사 춘희와 애인과 집에서 마지막 휴가를 보내려고 온 철수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집에서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당시 TV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던 이성재의 스크린 데뷔작이며, ‘춘희’ 역을 맡은 심은하는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 부담 없이 보기 편한 로맨스에 웃음과 흐뭇한 감동이 어우러져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극중 삽입된 음악 ‘시놉시스’는 TV 프로그램 러브하우스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유명세를 탔다. 이정향 감독은 이후 [집으로…]를 연출해 다시 한번 성공을 거뒀지만, 2011년 [오늘] 이후 오랫동안 차기작 소식이 없다. 올해는 이정향 감독이 새로운 작품으로 컴백하는 소식이 들리길 바란다.
멜로 장인 허진호 감독은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로 인생 작품을 선사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정원이 다가오는 죽음 앞에 삶을 정리하던 중 주차 단속요원 다림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주인공이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는 신파적인 스토리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담아내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차분히 삶을 정리하는 한석규의 연기는 애잔한 감정을 자아내고, 그동안 스크린에서 자신에게 맞는 배역을 찾지 못한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 두 주인공의 로맨스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영화가 끝나고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허진호는 이후 [봄날은 간다], [호우시절], [외출], [행복] 등으로 멜로 영화에 탁월한 연출력을 발휘했고, 최근 [덕혜옹주] [천문] 같은 시대극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11년 3월, 개봉하자마자 평단에서 “올해의 발견, 가장 빛나는 데뷔작”이라는 극찬이 끊이지 않았던 [파수꾼]. 아들 기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을 품은 아버지가 기태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점점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사소한 말다툼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세 친구가 멀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내 호평이 쏟아졌고, 주연을 맡은 이제훈, 박정민은 실제 고등학생으로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 주목을 받았다. 두 배우 역시 이 작품을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왕성한 활동 중이다. [파수꾼]은 아시안 신인 감독을 발굴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대표적인 섹션인 뉴커런츠에 초청되어 열광적인 반응을 얻으며 뉴커런츠상을 수상했고, 윤성환 감독과 이제훈은 그해 영화 시상식에서 신인 감독상과 배우상을 휩쓸었다. [파수꾼]에서 보여준 윤성현 감독의 놀라운 연출력으로 차기작을 많이 기다렸는데, 드디어 올해 근 10년 만의 후속작 [사냥의 시간]이 2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아빠], [아들의 것], [적의 사과] 등 단편영화에서 예리한 연출력을 보여준 이수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한공주]. 밀양 지역 고교생들이 벌인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끔찍한 사건을 겪은 공주가 일상에 복귀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극복해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린다. 한공주 역을 맡은 천우희가 뛰어난 연기를 펼쳐 큰 호평을 받았고,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현재 TV와 영화에서 맹활약하는 정인선도 공주의 친구로 출연했다. 개봉 전부터 해외 영화제에서 잇단 초청과 수상 소식이 끊이지 않았으며, 개봉 후 독립영화로는 22만 관객을 모아 흥행도 성공했다.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공주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작품의 진심이 관객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이수진 감독은 천우희와 다시 손을 잡고 [우상]을 연출했지만 아쉬운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한공주] 못지않은 훌륭한 영화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들]은 단편영화 [콩나물]로 각종 영화제를 휩쓴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외톨이 ‘선’이 전학생 ‘지아’를 만나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사람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두 아이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아역배우 최수인과 설혜인, 강민준의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연기는 보는 내내 미소 짓게 하며, 아이들의 시각으로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해 우스개 소리로 초등학생 버전 ‘파수꾼’이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윤가은 감독은 차기작 [우리집]에서도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따뜻한 드라마를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쯤 되면 본인 이름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웹툰 작가 출신 양우석 감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과 부림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변호인]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아직까지 비극의 상흔이 남은 한국 근현대사의 과오를 꼬집고 현장감 넘치는 법정 장면을 구현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송강호의 혼신을 다하는 연기는 법정에서 특히 빛나는데, 곽도원을 몰아세우며 내뱉는 대사는 뜨거운 메시지를 전한다. [변호인]은 최종 관객 1,137만 명이 관람해 데뷔작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유일한 감독이 됐다. 이후 양우석 감독은 자신의 웹툰 [스틸 레인]을 영화화한 [강철비]를 연출했고, 올해는 [강철비]의 주역 정우성, 곽도원과 다시 만난 [정상회담]으로 돌아온다.
한국영화에서 비운의 걸작 하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먼저 떠오른다. 지구가 위험에 처했다고 믿는 병구가 악덕기업 사장 강만식을 외계인으로 생각해 납치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영화다. 안타깝게도 개봉 당시 작품과 맞지 않은 홍보 전략을 취해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뒤늦게 영화를 본 관객들의 재평가로 입소문이 불기 시작해 지금은 한국 SF 컬트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엉뚱한 상상력이 전하는 웃음 속에 주인공 병구의 사연은 사회 부조리와 연결되어 분노와 슬픔을 자아낸다.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 이후 10년 만에 [화이]를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고, 2017년에는 [1987]이라는 굵직한 작품도 내놓았다. [지구를 지켜라]는 흥행 결과만 보면 실패했지만, 훌륭한 완성도로 다음 작품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평가를 받는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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