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금
과연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본문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일제 강점이 남긴 트라우마는 이런 탄식 같은 물음을 내내 남긴다. 18세기를 전후해 온 세상이 급변하던 시대, 한반도 안의 지도층은 과연 밖의 지식과는 단절된 채 성리학의 관념에 빠졌거나, 권력 다툼에만 골몰했던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열고 있는 특별전시회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는 그런 완고한 선입견에 의미있는 균열을 내려는 시도다.
기획자들의 말에 따르면, 규장각만 해도 그저 조선 왕실의 도서관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당대 세계의 지식을 집성하는 지식 공간이자 조선과 세계의 소통을 이끄는 기구였다.
18세기 후반, 조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상호 교류도 활발했다. 정조와 조선 정부는 이런 국제 정세를 적극 활용해 지식 세계를 확장하고 문화적 성장을 꾀했다.
조선은 그 전부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서적을 사들이고 새로운 정보를 수집했다. 이 작업은 정조 대에 와서 규장각을 통해 더 짜임새 있게 추진됐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전례 없던 문화 성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청나라의 변화는 괄목상대했다. 이 제국은 만주족의 문화와 중국의 전통 문화를 결합하고, 자신의 지식 체계에 서구의 근대적 학습과 문물을 용해하면서 중국 지배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정조는 앞선 대륙의 제국으로부터 지식을 수혈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구입해야 할 서적의 목록을 미리 준비하고 최대한 들여오려 했다. 수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독자적인 학문을 발전시키고 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 했다.
가령, 왕의 특명으로 청대 최고의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하기 위해 분주했던 연행 사절의 모습,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해 외국어 교재를 공부한 역관들, 격동하는 국제정세를 담은 ‘만국공보’의 수입 등은 조선이 나름대로 해외로부터 당대 최신 지식을 수입하기 위해 노력했던 증거들이다.
그런데도 왜 결과는 개혁 개방의 지연과 식민지화로 이어졌던가.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정호훈, 노관범, 김시덕 교수와 만나 이번 전시회의 의미와 의의, 남는 물음들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봤다.
-먼저 어떤 전시회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정호훈(이하 정): 이번 주제가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입니다. 규장각이 소장한 도서 중에는 조선에서 간행한 책 외에 중국이나 일본, 외국에서 사들인 책들이 있습니다. 이번엔 이 책들을 중심으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당대 지배층이 세계의 지식을 어떻게 수집하고 활용했는지 보여줍니다.
가령, 정조 시대 규장각 도서 목록인 ‘규장총목’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노력했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정조는 청이 만든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거금을 주고 수입했습니다.
고종이 수집한 집옥재(集玉齊) 도서도 서구 문명에 관한 당대 최신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최신 과학과 근대 문물, 격동기의 국제 정세까지 파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 국가를 향한 조선의 노력이 나름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노관범(이하 노): 그 전까지는 조선에서 간행된 실록, 의궤, 지도를 중심으로 전시를 해왔습니다. 규장각이 외부에서 들려온 도서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규장각이 수집, 정리, 관리했던 도서들을 중심적으로 살피고, 나아가 19세기 후반 고종대에 집옥재에 수집된 책들까지 포괄했습니다.
김시덕(이하 김): 이번에 특히 중국 책을 많이 소개하했습니다. 이 중에는 현재 중국에도 없는 책들도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규장각이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라는 차원을 넘어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와 같이 동아시아학 연구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것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규장각이 서울대에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요?
노: 규장각은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설립한 학술 기관입니다. 처음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는데 고종 대에 경복궁으로 옮겼습니다. 고종이 별도로 집옥재라는 도서관을 두면서 규장각 도서들이 그리로 갔습니다. 대한제국이 종말을 고하면서 규장각을 포함해 정부 부서별로 관리하던 고서들을 일괄 정리해 조선총독부에서 관리를 하다가 경성제대가 설립되면서 맡게 됐습니다.
해방 후 경성제대가 국립 서울대로 바뀌면서 규장각 도서도 승계됐습니다. 서울대 문리대를 거쳐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중앙도서관으로 모이게 됐고,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는 별도의 실을 설치했습니다.
그 후 새로 규장각 건물을 짓고 규장각 관장과 전임 학예직을 두었습니다. 규장각이 중앙도서관에서 독립한 후 규장각 도서의 해제사업과 자료연구사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규장각에는 어떤 자료들이 있나요?
정: 정조 시대 규장각이 만들어질 때 소장하고 있던 책, 항말의 집옥재 도서, 조선이 망하면서 규장각으로 모인 사고(史庫) 소장 도서, 조선의 여러 관청에서 소장하던 책과 자료, 경성제국대학 시절 구입한 책, 일반 고문서 등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경로로 수집한 책과 자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 제목을 ‘규장각 세계 지식을 품다’ 로 내걸었는데요?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 들어와 있던 세계의 지식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흔히 바깥 세계에 대한 지식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을 통해 개화파에 의해 유입됐다고 알고 있을 뿐, 사실상 같은 시기 중국에서 들어온 지식들은 거의 잊힌 상태였지요.
그 동안 우리가 한국 근대사를 지나치게 조선이라는 국가 단위로만 생각한 나머지, 실제로 조선도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중국이라든가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과 함께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을 잘 인식하지 못했거나 성찰이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가령, 고종의 집옥재에 다양한 과학 서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 중국에 와있던 서양 선교사가 전해준 서학 지식이 양무 운동과 연결돼 중국에 활성화돼 있었고, 그 주변국인 조선에도 상당히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앞으로 가능하다면 동아시아의 지적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관점에서 관련 자료들을 창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 제가 이번 전시회를 소개하는 글을 네이버에 올렸더니 이런 댓글이 붙었어요. “정조가 외국 책을 들여오기 위해 저렇게 많은 노력을 했구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라고요. 저는 우리 역사를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살펴보면, 결국 혼자만 잘 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바깥에 의해 압도된 것도 아니고 외부로부터 새로운 지식과 정보, 문물을 필요하면 받아들여 자기화하면서 성장해온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규장각이 만들어진 18세기말만 해도, 정조가 외부를 보면서 지식과 정보를 담은 자료들을 끌어와 성장과 변화를 이루려 했습니다. 세종대도 그랬고 여러 시기에 걸쳐 그런 시도를 확인 할 수 있는데, 18세기 말이 두드러졌지요. 19세기말 고종 때에 와서도 또 한 차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 테두리에만 갇혀 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외부와 소통하고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키워나가고 확장하고 변화하려고 했던 역사의 모습들을 이번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이미 조선도 당대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과 수용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규장각 장서 중에 그런 수입서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런 지식이 사회에 얼마나 유통됐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 같은데요.
정: 네, 논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일단은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질서 속에 우리가 편입돼 있었으니까 독자적인 행보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 한계 안에서도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지식을 받아들였으면서 왜 변하지 못했는가. 이건 또 다른 문제지요. 조선으로 들어온 지식 중에는 내부에서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는 요소도 있었을 테고, 또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것도 있었겠지요. 그 과정에서 변화의 의지와 노력과 그걸 가로막고 제한하는 요소들이 다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봅니다.
노: 정조대와 고종대를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가령, 건륭제 치하의 중국을 두고 영조 대와는 달리 정조대는 굉장히 밀월 관계였습니다. 그 때 청으로부터 지식, 문헌들이 대거 수용됐습니다. 정조는 그런 것을 활용해 절정기 청의 문화를 보여주면서 “조선이 고루하다, 향상돼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고 사업도 시도했던 거죠.
반면, 고종대에는 대외적으로 중국에 밀착하기보다 오히려 벗어나 세계 만국과 보편적인 외교 관계를 누리는 근대 체제로 편입돼야 하는 시점이었습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국내 질서가 와해될 상황이다 보니 조선의 안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유교 질서를 회복하고 중국 체제에 기대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책이 들어와도 전면적으로 국가 정책에 활용하기보다는 사회적인 동요와 불안을 더 우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1905년 전까지 조선은 국가 주도적인 시스템이었고 민간에서 자율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밖에서 들여온 여러 책들을 개별적으로 읽고 보기는 했지만 전면적인 정책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웠던 거죠.
김: 조선의 사대부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격취휘편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서양 사정을 소개했어요. 여기에 존 프라이어라는 사람이 영국에 가서 한 달 동안 런던 근처 공장을 취재해서 리포트를 실었는데, 한성순보가 이 내용을 받아 실었어요.
당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에서 개항장을 중심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엄청난 양의 책들이 출간됐고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왔던 거죠. 이걸 얼마나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더 따져봐야 하지만, 최소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는 거지요.
정: 18세기 말에 나온 전하도지도 같은 경우는 정보와 지식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지도를 조선에서도 재현할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조선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사회를 바꾸는 상황까지 가려면 시간이 필요했겠지요.
김: 당대 여러 나라의 해외 정보 유입 수준은 비슷한데, 차이를 낳은 것은 결정적 촉매제인 위기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초에 러시아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걸 느낀 상태였는데, 중국이나 조선은 이 부분이 결여돼 있었다고 봅니다.
정: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이 평화 상태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노: 중요한 점인데, 가정이지만 건륭제 이후에 조청 관계가 파탄이 나서 조선 혼자밖에 없다고 했다면 뭔가 자구책을 열심히 도모했을지도 몰라요. 거대한 중국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너무나 오랫동안 갖고 있어서 중국에 들어오는 서양 지식도 쓸모는 있지만 보조적인 정도로 생각했지, 아주 절박한 지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전시작을 보면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정: 이게 규장총목인데요. 세 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목록에 적힌 책이 700여 종인데 규장각이 만들어지면서 소장하고 있던 외국본, 특히 중국 도서의 목록 겸 해제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별로 제목을 제시하고 핵심 내용을 추려서 정리했습니다. 초기 규장각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 중 하나입니다.
규장총목은 정조 5년에 처음 만들고 순조 5년에 증보를 했는데, 600여 종에서 700여 종으로 늘었습니다. 100여 종 늘어난 걸 보면 그렇게 많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한 종의 권 수가 여러 권이 되니까 전체 분량은 상당히 큽니다.
숙종, 영조대에도 중국에서 책을 많이 들여왔는데, 정조대에 오면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규모 있게 목록을 만들어 구입해서 특별한 장소에 보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에 찍힌 도장을 장서인이라고 하는데, 정조는 자신이 귀하게 여긴 책은 도장을 찍어서 특별히 분류해 보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의 학구열이 대단했군요.
대단했죠. 이건 고금도서집성인데요. 규장각에서 보관하는 책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책이랄까요, 높이 평가하는 책입니다. 중국 옹정제 때 만들어졌는데, 당시 18세기 전반 중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중요한 서적을 집성해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만 권인데요. 두 권을 한 책으로 묶어서 오천 책이 됩니다. 여기에 조선국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이런 도장을 찍은 게 많지 않은데 그만큼 가치 있게 봤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들은 중국에서 가져와서 조선식으로 개장하면서 표지를 바꿨습니다. 중국은 책머리를 네 번 꿰매는데, 조선식으로 다섯 번을 꿰맸습니다.
고금도서집성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 지식을 담은 책도 있었습니다. 기기도설이 대표적인데, 표지 제목을 기기도설이라고 적어두고, 고금도서집성의 마지막 부분에 실었습니다. 16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기계의 작동 원리를 담은 책입니다. 이걸 중국 사람들은 중국 식으로 바꿨습니다. 등장 인물도 중국인으로 바꾸고.
정조가 이걸 보고 활용할 수 있겠다 싶어서 수원화성을 만들 때 정양용에게 이 책을 주지요. 이걸 보고 기중기를 만들어 봐라 했는데 정약용이 이걸 바탕으로 해서 거중기라는 이름의 새 기계를 만들어 화성 축성 때 사용합니다. 고금도서집성이 조선에 들어와서 실제로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지요.
-왕실에 들어온 책을 사회적으로 유통시키기 위한 움직임이나 노력은 없었나요?
정: 필사 문화가 발달했으니까, 빌려서 필사를 해서 봤을 것 같긴 한데, 활자나 목판으로 찍어서 배포한 노력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덕무가 ‘사소절’이라는 책을 만드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의 현대 지식이에요. 이런 지식을 어디에서 구했는가 하면 규장각에서 근무하면서 필요한 내용을 뽑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김: 고금도서집성의 경우 일본에도 세 부가 들어갔는데 열심히 본 것 같지는 않고, 쇼군이나 왕실이 그런 책을 갖고 있으면 권위가 서니까 보유한 측면도 있습니다.
김: 사실 이 책은 중국에서도 편리한 책인가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었지요.
-중국에서도 대중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았나요?
정: 왜냐하면 66부밖에 안 찍었으니까요.
정: 이 지도는 북경전도인데 남쪽에 ‘유리창’(유리제품 만드는 공장)이라고 해서, 서점이나 문방사우를 구할 수 있는 상점, 골동품을 구할 수 있는 가게도 많았습니다. 여기서 파는 책들은 양쯔강 이남에서 제작돼 정기적으로 배에 실려 이곳에 집결됐다고 해요. 책이 모이니까 중국 문인 학자들도 모여들고 기숙해서 살고, 조선 사람들은 이곳에서 중국 학자들을 만나거나 책을 구하러 간 거죠.
김: 그나마 청나라 때에는 출입을 허용해 줬지만, 그 전에는 조선에 대한 경계가 강해서 사신들이 집 밖에도 잘 못 나갔다고 해요.
김: 이건 유럽에서 들어온 정보를 가지고 만든 중국 책을 조선에 들여와서 다시 개량한 지도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북반구는 추우니까 파란 색, 남반구는 다 붉은 색으로 칠했습니다. 적도 이남으로 내려가면 다시 추워진다는 생각을 못했던 거지요. 정약용의 제자인 황상의 증언에 따르면, 스승이 돌아간 후에도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보고 있었다고 나오는데, 아마 이런 지도가 당시에 유포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 외국에 대한 조선의 지리적 지식도 저런 책들을 통해 나름대로 확보가 된 거죠.
-이 특이한 그림은 뭐죠?
김: 청나라 때 출판된 세계인물도 같은 겁니다. 중국 밖의 세상 사람들을 보여주는 거죠. 기본적으로 다 야만스럽게 그렸는데, 그래도 인간에 가까운 윗쪽이 일본과 여진이고 아래로 갈수록 심각한 야만으로 그렸습니다. 기본적으로 ‘산해경서’에 나오는 이미지들이에요.
-삼재도회(三才圖會)도 대단한 책이라면서요?
대단한 책이죠. 처음으로 대량으로 그림을 수록한 책입니다. 널리 읽히고 영향을 줬습니다. 이게 일본으로 가서 화한삼재도회가 나오는데, 그림이 훨씬 섬세해집니다.
김: ‘화한’이라는 것이 일본의 이념인데, 중국의 한과 일본의 화라는 것이 동격이라고 본 거죠. 중국과 일본을 일대일로 붙인 거죠. 제가 다 찾아봤는데 중국 삼재도회에는 나비가 한 점이 있다면 일본에는 네 점, 다섯 점이 있어요. 같은 책을 두고도 아시아 3국의 문화적 차이가 반영되는 거지요.
-조선은 왜 그림을 꺼렸을까요?
김: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애들 책에 그림이 많고, 성인이 보는 책에는 그림이 별로 없잖아요. 그림이 들어간 것은 병법서나 의학서, 불경 정도이고, 나머지 책들은 그림을 빼는 형태로 갑니다. 그림은 인민들 교화할 때만 쓰는 정도로 본 거지요. 일본도 중국 사대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집들은 책에서 그림을 빼는 경향이 있었어요. 중국도 마찬가지고 일본도 상업출판의 경우에는 그림이 들어가는 책이 많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건 명나라 단편소설집인 형세언인데 세계 유일본입니다. 책에다 이렇게 낙서를 열심히 한 사람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로 추정됩니다. 사도세자가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그림으로 그려서 보게 한 것 같은데 왕실에서는 널리 읽혔다고 해요.
김: 사람들이 제일 충격을 받는 게 이 그림입니다. ‘개자원화전’이라는 중국 책인데, 다색 인쇄가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책이예요. 일본에서 우키오케가 생겨나고 조선에서도 김홍도나 화가들이 보고 배운 책이지요.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고유의 것이라고 배웠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줄 만하죠.
노: 점석재는 중국 상해에 있었던 인쇄소인데요, 19세기 후반 중국 출판의 메카 같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신보’라는 신문도 찍고, 상해 풍경 화보도 찍고, ‘고금도서집성’ 대중판도 찍어 냈지요. 이곳에서 서양 풍물을 소개하는 책을 찍어냈으니까 당시에 지적으로 굉장한 영향을 미쳤겠죠.
-이건 집옥재 서적목록이군요.
정: 1908년 정도에 도서를 정리하면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집옥재는 함녕전 별당으로 시작했는데 1891년 고종의 거쳐였던 건천궁 옆으로 옮겨왔다고 해요. 1887년 경복궁에 에디슨 회사하고 계약을 맺어서 처음 전깃불이 가설됐으니까, 집옥재가 왔을 때는 고종이 환한 불빛을 받으면서 책을 읽었을 거라고 짐작이 됩니다.
여기 ‘화학감원’이라는 책이 중요한 게, 화학에 대한 서양 문헌을 번역한 책인데 화학 용어를 결정지은 게 이 책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학도설’이라는 책은 전기학에 대한 책으로 1887년에 출간됐습니다. 그때 경복궁에 전깃불이 켜진 해이고 해서 조선에서 전기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됐을 때였어요.
1887년 조선에서 전선을 가설을 하는데 처음엔 청나라 기술에 의존했다가 한양-부산 구간 전선만큼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가설합니다. 그래서 추측하기로는 당시에 들어온 전기 관련 책자들이 주목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건 ‘서의약론’이라는 책인데요. 외과 수술과 관련해 조선에 재중원이 만들어진 게 1880년대 중반인데, 그 시대의 분위기에 잘 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책이 들어와 있었다는 거랑 시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별개지요?
정: 세브란스에서 의사를 길러낸 게 1890년대부터니까 시기적으로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노: 여기 ‘부국론’이라는 책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포셋이라는 경제학자가 쓴 ‘Manual of Political Economy’를 번역한 겁니다. 포셋이 존 스튜어트 밀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쓴 책인데, 1860년에 북경이 영불연합군에 함락된 후 중국 정부에서 세운 동문관이라는 외국어학교에서 학생들 교재로 번역한 거라고 해요. 영어 교재 겸 경제학을 공부하는 책이 된 거죠.
이건 ‘태서신사남요’라는 책인데요, 티모시 리처드라는 서양 선교사가 썼습니다. 그가 선교 활동을 하다가 텐진에서 언론 매체의 주필이 됩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서양을 몰라서 발전이 더딘 거라고 생각하고 사명감을 갖고 중국에다 서양 지식을 전하기 위해 글을 써요. 나중에 ‘시사신론’으로 출간합니다. 그걸로 부족했던지 맥켄지가 지은 ‘The Nineteenth Century’라는 책까지 ‘태사신사남요’로 번역했어요.
노: 1896년 조선에서는 독립협회가 매달 두 번 잡지를 만들었어요. 거기에 보면 ‘격취휘편’ ‘시사신론’ ‘태서신사남요’를 조선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이야기해요. (격치휘편은 서양 근대 과학기술을 포함한 서양의 사정을 기사로 다룬 잡지였다. 영문 서명은 ‘Chinese Scientific Magazine’. 존 프라이어가 편집 실무를 맡기 시작한 1876년부터 상해 강남제조국에서 발간했다. 기사들 대부분은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이 번역했다. 이 중 단행본으로 출판된 기사도 적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이 잡지를 꾸준히 수집했으며, 이를 통해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고, 정부 정책 개혁에 도움이 될 만한 이기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실린 기사들은 상당수 ‘한성순보’ 등에 전재되어 조선에 널리 알려졌다.)
노: 대한제국 초기 학부(지금 교육부) 대신 중에는 진보적인 사람이 많았어요. 1898년 학부에서 전국 소학교에다 문제를 출제했는데, ‘영국은 어떻게 세계 1등국이 되었으며, 한국은 세계에서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였어요. ‘한국과 영국의 정치를 비교하라’는 문제도 나오고. 이런 지식이 대한제국 초기에 어떤 계몽 차원이랄까, 요긴하게 쓰였던 것을 볼 수 있어요.
이것은 ‘만국공보’라고 해서,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가졌다고 하기보다는 민간에서 많이 봤던 잡지입니다. 규장각에 소장된 것은 월간지예요. 그보다 앞서 주간지도 있었어요. (만국공보는 주필 알렌을 위시해 중국에서 활약하단 유명한 서양 선교사들이 다수 필진으로 참여했다. 기독교 지식에 한정되지 않고, 서양 근대 지식 일반과 세계 각국의 시사를 소개한 종합 잡지였다. 이 잡지는 세계 각지 화교 사회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널리 퍼졌다. 조선에도 일찍이 역관 김경수가 주간 ‘만국공보’를 간추려 ‘공보초략’을 편찬한 바 있고, 대한제국 수립 후에는 월간 ‘만국공보’가 그대로 유입됐다. 신문과 학회지에도 곧잘 전재되어 사회적으로 널리 읽혔다.)
월간지 내용을 보면 근대 매체다 보니까 상업 광고도 많이 있어요. 모유를 먹은 아이와 연유를 먹은 아이의 발육 상태가 다르다는 그림을 넣은 광고도 있습니다.
이 ‘섬라중흥기’는 섬라에 대한 이야기인데, 대한제국 초기에 제일 관심 있었던 나라가 섬라, 곧 타이었어요. 당시 서양에서 타임지에 아시아 국가의 근대화를 비교하면서 일본, 타이, 이집트, 한국을 비교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게 ‘섬라중흥기’예요.
이걸 만국공보에도 실었는데, 독립신문 편집자도 이걸 그대로 옮겨온 거에요. 대한제국 초기의 국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는데 만국공보나 독립신문에 이런 글이 있으니까 가늠할 수 있게 된 거에요.
이 글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에서 근대화가 잘 되는 나라라고 돼있고, 이집트와 타이는 요즘 열심히 하고 있는데, 특히 타이가 국왕 주도 아래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나와요. 그런데 한국은 겉으로 제도는 갖췄지만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 조선시대 그대로라고 나와요. 그래서 사사건건 구습에 빠져있다고 말하거든요.
이 글이 당시 한국 사회에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의식을 고취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어요.
-만국공보가 조선에서는 얼마나 읽혔나요?
노: ‘독립신문’이나 ‘한성신문’ 같은 신문에서 그걸 곧잘 가져와 실어요. 그 당시 청년 유학자들이 그걸 읽고 독후감도 쓴 게 있고, 이게 러일전쟁 이후 1907년까지 가는데 그때까지는 한국의 웬만한 지식인들이 서양에 대한 지식을 얻었던 원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기사와 관련해서 쓴 글들은 없나요?
노: 그리스 철학에 대한 비평서인 ‘고대희랍철학고변’을 남긴 유명한 사람으로 경상도에 이인재가 있었는데, 그 책에 앞서 ‘만국공보’ 기사를 보고 대한제국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혁 방향에 대해서 논한 ‘구경연의’라는 글이 있어요.
-화한삼재도서가 조선에 다시 유입이 됐다고 하는데, 그 무렵부터 일본이 앞서기 시작했거나 독자적인 걸음을 시작했다는 건가요?
박: 조선이 일본에 영향을 준 부분은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게 불가피하게 영향을 준 것이고, 그 후에 조선의 책이 대량으로 수출되지는 않죠. 1650년대 정도가 되면 일본이 나카사키를 통해서 청나라 상인들과 정식으로 거래를 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지요.
-마지막으로 결론 삼아 한 말씀씩 해주신다면요?
정: 조선이나 조선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 대한 우리의 경직된 인식이 조금은 유연해졌으면 합니다. 조선 초기나 중기, 18, 19세기도 각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식 정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물론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자율적인 근대화는 실패했지만 그 시간 역시 우리의 긴 역사에서 보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전체 역사의 움직임 속에서 본다면 그동안 축적된 힘들이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 이후 고도의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큰 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걸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특별전 한 번 가지고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쌓은 힘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계속 물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 예전에 15년 전쯤 박사과정 때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과 스페인 그라나다에도 갔는데, 그 때가 마침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를 기념하는 해였던 것 같아요. 빈에서도 카를 5세의 화려한 제국을 전시하고 있었고, 스페인 남부 마지막 이슬람 왕조가 있었던 그라나다에서도 똑같이 카를 5세를 기념하는 전시를 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지리적으로 떨어진 두 곳에서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우리가 규장각이 소장한 중국본 자료를 가지고 전시를 했는데, 제가 알기로는 몇 년 전 양무운동의 거점이었던 상하이의 도서관에서도 근대 서학 도서를 집중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중, 일 각국에서 비슷한 컨셉으로 동아시아 근대의 동시성을 동시에 전시회로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요. 일국 체제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를 통해서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었는지를 본다면, 선진과 후진의 격차보다 역사의 동시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 중, 일을 지식의 공통된 장의 단위로 보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동시적인 성찰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역사 분쟁에서 늘 근원적인 철학적 빈곤이 뭐냐면 누가 앞섰다 누가 뒤섰다, 누가 고차원이다 저차원이다는 식의 비교만 하기 쉬운데, 각자 자기가 위치한 곳에서 동시적으로 발현된 양상들을 거시적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싶은 거지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규장각도 중국, 대만, 일본 이런 곳의 기관들과 같이 기획을 하면 좋겠습니다.
김: 이번 전시를 통해 깬 게 뭐가 있을까? 저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여기가 한국학 도서관이지만 동아시아 전체를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규장각을 그저 정조의 왕실 도서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의 10%도 설명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최소한 고종 때 집옥재라든가, 중국 근대 지식의 수입을 빼놓고는 이 기관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20세기 시기 문제도 있습니다. 즉 경성제국 대학 시절의 것들은 못 다뤘어요. 대한제국이 망하고 총독부가 규장각을 장악했을 때 각 기관의 책과 자료를 모아 만든 것 부분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도 미완의 과제입니다.
정: 그 시기에 대한 조명이 충분하지 않은 것은 어떤 금기 때문이어서라기보다 아직 여력이 미치 못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 전체를 정리하고 그에 맞춰 책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복잡하죠. 보통 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그렇고.
식민지를 거치고, 분단이 되고, 전쟁도 나고 하면서 국가의 주요 기관에서 관리하던 오랜 책과 자료, 고문서들이 엉망진창으로 흩어지고 사라지고 뒤섞여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규장각에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규장각에서는 예전에 해왔던 대로 긴 시간 계획 속에 인력과 시간을 투입해 자료를 정리하고 또 그 자료를 활용한 한국학 연구를 진행해 나갈 겁니다.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 특별전은 2016년 1월 16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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