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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기고 상처받은 명당, 용인 - 정몽주·이석형 묘, 채제공의 묘, 유형원의 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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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기고 상처받은 명당, 용인 - 정몽주·이석형 묘, 채제공의 묘, 유형원의 묘

산마루금 2016. 2. 9. 16:34

 


 

사거용인의 실례들

     [포은 정몽주의 묘]
     모현면(慕賢面) 능원리에는 고려 말의 삼은(三隱) 중의 한 분이신,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는데, 모현면은 선생의 절의를 추모하여 생겨난 땅 이름이다. 삼은이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하여 권력을 잡고 조선을 창업하자, 그들의 어떠한 유혹에도 끝까지 고려조의 지조를 지킨 여말(麗末) 3인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말하며, 이들은 개성 송악산(松嶽山)을 배경으로 송도의 자랑이기도 하다.

     역성 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둘째 아들 방원(芳遠)을 시켜 고려에 대한 포은의 충성심과 조선 창국에 협력할 수 있는 지를 알아 보려 하였다. 이 때 지은시가 「해동악부(海
東樂府)」에 한역(漢譯)되어 전하는데, 방원이 하여가(何如歌)부르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의 시조를 들은 포은은 마음으로 그 뜻을 받아드릴 수 없음을 단심가(丹心歌)로 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햔 일편단심이야/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회유에 실패한 방원은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선죽교에서 철퇴로 살해하고, 그때 흘린 핏자국이 지금도 얼룩져 남아 있다고 한다. 포은이 집으로 올 때 활을 메고 앞을 지나가는 무사가 있었다. 포은이 녹사(錄事)를 시켜 멀리 떨어져 오라고 이르자,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

     하였다. 포은이 살해 당할 때 두 사람이 서로 끌어 안고 죽었는데, 그 당시 창졸간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포은의 충절과 기개를 두려워하여 어떤 찬양도, 비각도 세우지 못하게 하였는데, 사후 4백년이 지난 정조 4년(1789년)에 처음 비를 세웠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은 경상도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는데, 모친 이씨(李氏)가 난초 화분을 품에 앉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아 어릴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다. 그 후 포은이 어릴 적에 부친이 또 꿈을 꾸었는데, 용 한 마리가 마당의 배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꿈을 꾸고 깨니 몽란이 그곳에 있어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성인이 된 뒤에는 몽주(夢周)로 다시 고쳐 불렀다. 포은 묘는 원래 풍덕군에 있었는데, 후손이 고향인 영천으로 묘를 이장하려 하였다.

     예를 갖추어 선생의 묘를 옮길 때, 면례 행렬이 이곳 용인군 수지면 경계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며 앞서가던 명정이 바람에 날아갔다. 날아가는 명정을 쫓아 와 보니 명정은 이곳에 떨어져 있었고, 이를 심상치 않게 생각한 후손이 지관을 불러 지맥을 보니 명당이라 하여 이곳에 묘를 안치하였다 한다.

     재실인 영모재의 뒤쪽에는 낮은 산을 병풍삼아 두 개의 묘가 산등성이까지 펼쳐진 초원 위에 자리했는데, 왼쪽 것은 포은의 묘이고, 오른쪽 것은 손녀 사위이며 대학자였던 이석형(李石亨)의 묘이다. 두 개의 묘비 중에서 고려에 대한 단심(丹心)과 문묘에 배향된 기록을 보면,

     "정덕(正德) 12년 정축(丁丑 1527년. 중종 12년) 태학사의 학생들이 임금께 글을 올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는 충과 효가 있고, 理學에 있어서도 동방의 시조이며, 사문(斯文:유학)에도 매우 조예가 깊으니 문묘에 배향하길 청한다 하자 임금은 청을 허락하였고, 그해 9월 17일 그를 문묘의 서쪽 문창후(文昌候) 최치원 선생의 뒷쪽에 배향하였다. 또한 명을 내려 분묘를 수리하고 표석(表石)을 세우게 하였는데, 고려의 벼슬 이름만 쓰고 시호인 문충공(文忠公)을 쓰지 않은 것은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라고 쓰여 있고, 비석 앞면에는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라고 쓰여져 있다. 오른쪽의 이석형(李石亨, 1415∼1477) 선생은 본관이 延安이고, 호는 저헌(樗軒)이다. 1441년(세종 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는 등 세종 때 무려 세 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뒤 사간원의 정원(정6품)에 제수되고 이듬해부터 14년 동안은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며 응교·직전(直殿)·직제학(直提學)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왕명을 받고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 힘쓰기도 하고, 전라도 감찰사도 역임하였다. 1460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서쪽 지방을 순행하는 세조을 정성컷 모시어 그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불리었고, 그 후 사헌부 대사헌·경기 관찰사·호조 참판을 거처 판한성부사로 7년간 있으면서 호패법 시행을 엄격히 하자고 주장하였다.

     저헌은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고려사」의 편찬에도 참여하고, 세조 때에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을 정하는데 참여하여 「논어」의 구결도 주관하여 문장을 떨쳤다. 1470년 성종 원년에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과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상을 떠나자 문강(文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석형의 묘가 포은의 묘 옆에 위치한 연유에 대하여 전해 오는 일화가 있다. 포은의 묘를 영천으로 이장할 때 바람에 날린 명정이 떨어진 곳은 사실 지금 이석형의 묏자리이었다. 이때 포은의 후손이며 이석형의 부인이 이곳이 명당이란 말을 듣고 친정집보다는 시댁 가문을 일으키려고 밤새 이곳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다음날 포은을 모시려고 광중을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어 할 수 없이 옆 언덕에 묘를 썼고, 뒤에 그 자리에는 연일 정씨가 남편인 이석형을 모셨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석형의 묘가 더 명당이라 했는데, 과연 어느 분의 묘가 더 명당이냐는 설이 시중 풍수사 가운데에도 분분하다. 여기서 간단히 묘의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풍수 경전인 『장경(葬經)』에,

     氣乘風則散 界水則止- 용맥을 따라 흘러가던 생기는 물을 만나면 멈추어 응집되고, 그 응집된 생기에 바람이 들면 기는 흩어져버린다.


     따라서 풍수에서는 주변의 산들이 사방에서 혈장을 겹겹으로 에워싸 바람을 가둔 형국(形局: 묘를 에워싼 산천의 형세를 말한다)인 장풍이 잘된 곳을 명당을 꼽는다. 소위 뒤에는 주산이 뒷바람을 막아주고, 좌우에는 청룡과 백호가 팔을 뻗어 감싸안고, 앞쪽에는 안산이 앞 바람을 막아주는 형국을 길지라 말한다.(풍수의 길한 형국을 보여준다. 조감도 활용) 그런데 아무리 청룡과 백호가 감싸안아도 자연황천인 곳은 바람으로 인해 생기가 흩어지며 흉지가 된다.

     〈自然黃泉〉-【楊筠松 訣】
     左旋龍要收右旋水 右旋龍要收左旋水 方爲合局--좌선룡에는 우선수가 收水하고, 우선룡에는 좌선수가 收水한다. 즉, 산수는 음양이 일체이다.


     이에 따라 묘에서 산 아래쪽을 바라보자. 풍수는 외당(外堂:혈장 바깥의 바람과 물의 흐름)을 살핀다고 하는데, 외당의 물이나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면 좌선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면 우선수이다.

     그런 다음 기준으로 삼은 산자락의 내당(內堂:혈장의 지형과 지질을 변화시키는 바람의 양으로 보통 좌우 계곡의 깊이와 넓이를 의 미한다)을 살피는데, 외당이 좌선수라면 내당도 좌선수여야한다. 즉 왼쪽의 계곡이 오른쪽의 계곡보다 크고 넓어야 한다. 또 외당이 우선수라면 내당도 당연히 오른쪽 계곡이 왼쪽의 계곡보다 크고 넓은 우선수가 된다.

     그래야 외당과 내당의 자연 순환이 일치하여 그 산자락엔 물이 차지 않고, 바람도 들어 치지 않는다. 만약 외당이 좌선수인데 내당은 우선수라면(외당이 우선수인데 내당은 좌선수인 경우도 마찬가지임) 내당으로부터 흘러간 양기(陽氣:물과 바람)가 외당의 양기를 받아치는 형세가 된다. 즉 작은 양기가 큰 양기에 순행하지 못하니 내당으로 다시 밀려 들어와 산자락에 물과 바람이 들어차게 된다. 풍수는 이를 自然黃泉에 걸렸다고 한다.

     큰 하수도관에 역행하여 작은 하수관을 설치하는 경우이다. 물이 큰 수도관을 지날 때에 작은 수도관의 방향이 마주보고 있으면 큰물은 작은 관으로 치고 들어간다. 그러면 작은 수도관에 있는 물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역류한다. 물이 빠져나가야 할 하수관에서 오히려 물이 솟아오르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명당을 구하기 위해 최초로 해야 할 일은 외당과 내당의 자연 순환이 상호 일치하는 내룡을 찾는 일이다.

     정몽주의 묘와 이석형의 묘를 살펴보면, 두 묘 모두 주산에서 내려뻗은 내룡의 입수가 비슷하여 어느 것이 더 생기가 뭉친 자리라 판단하기 어렵다. 보통 묘에 석물을 더 요란스럽게 치장한 정몽주의 묘가 더 명당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풍수적으로 묘지의 길흉을 판단할 때는 언제나, 용, 혈, 사, 수, 향에 의거해 각각의 길흉을 판단한 다음 종합 결론으로 평가하는 방법이 쓰여진다.

     용(龍:산줄기가 뻗어감이 마치 용이 꿈틀대며 달려가는 것과 같다고하여 풍수에서는 산줄기를 용이라 부른다)
     혈(穴:생기가 응짐된 장소를 말하며 보통 명당이라 한다)
     사(砂:혈장을 에워싼 주변의 산들을 가리킨다)
     수(水:혈장 앞쪽으로 흘러가는 물줄기의 모양이나, 바람과 물의 흐름을 말한다.)
     좌향(坐向:묘의 앞뒤쪽을 하며, 좌는 시신의 머리방향이고, 향은 다리를 뻗은 방향으로, 좌와 향은 서로 반대방향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어느 묘가 잘풍이 잘되어 생기가 흩어지지 않는가만을 살펴 우열을 가린다. 두 묘 모두 외당의 흐름은 좌선수이다. 그런데 정몽주의 묘는 내당인 오른쪽이 왼쪽보다 넓은 우선수인 자연황천이고, 이석형의 묘는 왼쪽이 넓은 좌선수의 자연순행의 땅이다. 따라서 이석형의 묘가 더욱 장풍이 잘되어 풍수적으로 길지가 된다. 하지만 최종적 판단은 내룡의 입수와 혈장의 안정성, 그리고 좌향의 좋고 나쁨까지 가려서 판단해야 옳다.

     [번암 채제공의 묘]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선생은 본관이 평강(平康)이며, 호는 번암(樊巖)이다.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아들로 홍주에서 출생하였고, 1743년 문과 정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폐위를 거론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너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다. 1771년 호조 판서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 왔고, 그 후 평안도 관찰사·예조 판서를 지내고,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1793년 영의정에 오르는 등 10여 년간 재상으로서 왕을 보필하였다. 당파에 온건히 대처하여 천주교 박해가 확대되지 못하도록 한 공이 후세에 전해지며, 문숙(文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임금은 과거 시험을 치룰 때 매번 흔하지 않은 책에서 아무도 모르는 과제(科題)를 내어 시험을 보였다. 한번은 '화부화(花復花)'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내고 싶었으나 오직 채제공만은 알고 있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 후 채제공(蔡濟恭)이 죽자 정조는 다시 이 제목으로 문제를 내기로 하였다. 영남에 사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다가 용인에서 날이 저물었다. 하룻밤 자고 갈 집을 찾다가 한 노인이 살고 있는 집에 묵게 되었다.

     그 날 밤 노인이 말하기를, "금번 과제는 '화부화(花復花)'일 것이니 그대는 그 것을 제목으로 과거시험 준비를 하시오.”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뜻을 모르자 선비는 어떤 책에 나오는 글이며, 또한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화부화(花復花)는 목화라고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 목화는 꽃이 피는 것은 물론이오, 꽃이 지어 솜이 되어도 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여 과제를 보니 바로 '화부화(花復花)'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다른 선비들은 모두 그 뜻을 몰라 붓방아만 찧었으나, 그 선비만은 당당히 제일 먼저 답안을 제출하였다. 정조가 시험 답안을 살피던 중 자기가 의도한 대로 답안을 낸 자가 있어 급히 불러 묻기를, "자네는 누구이며 어느 누가 그 뜻과 제목을 가르쳐 주었느냐?" 하자, 선비는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임금이 다시 그 노인의 용모와 사는 곳을 물으니 용모는 채제공이요, 사는 곳은 그의 무덤이었다. 임금이 감탄을 하며 말하기를, "채제공은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나." 하였다.체재공의 묘 앞에는 비각이 있는데, 이 비각은 '채제공 선생 뇌문비'를 모신 각(閣)이다.

     뇌문비( 文碑)는 정조대왕이 번암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생전의 공적을 친히 짓고 쓴 뇌문을 새겨 세운 비석으로 두전(頭篆)에 새긴 '御製 文'이라는 글자는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고, 임금의 친필 어제이기 때문에 찬(撰)하고 쓴 사람이 없다.

     번암의 묘의 비문(碑文)에는,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檢校奎章閣提學 贈文肅公 樊巖蔡先生濟恭之墓'라 쓰여 있고, 양쪽에는 망주석과 석양(石羊)을,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묘에는 잔디가 곱게 자랐고, 왼쪽에는 늙은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갖은 풍상에 시달렸는지 구불구불 자랐다.

     [반계 유형원의 묘]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선생의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예문관 검열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병자호란과 모친의 상을 당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결국 소과에 급제하여 벼슬이라면 세상을 떠난 뒤 통정대부로서 집의 겸 세자시강원 진선에 추증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전라도 부안(扶安)의 우반동(愚磻洞)에 낙향하여 일생을 농촌에 묻혀 제자를 양성하고, 아울러 농촌 사회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써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했고, 그 곳에서만 20년을 보내며 52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책은 나라와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체계적으로 개혁안을 제시한 이 책은, 주로 토지 제도의 개혁과 교육 및 관리 임용의 개혁에 촛점을 맞추었다.

     유형원의 묘는 석천리의 능말에 있는데, 뒷산의 형상이 능(陵)과 같다 해서 생긴 땅 이름이다. 반계의 묘는, 봉분 뒤로 곡장을 두르고 문인석이 양쪽에 있다. 1768년 판중추 홍계희(洪啓禧)가 찬하고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가 세운 묘비 정면에는 벼슬명이, 그리고 옆과 뒷면에는 일대기를 새겨 넣었다. 묘비 정면에는 '有明朝鮮國進士贈執義兼進善 磻溪柳先生馨遠之墓. 贈淑人 豊山沈氏 左'라 쓰여 있다.

     유형원의 묘가 좋은 터인가를 살피려면, 말법집을 보면된다. 10년 전에는 상석과 향로석 틈에는 말벌이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은 곡장(曲墻:모의 봉분을 에워싼 담장)에 큰 말벌집이 달려있다. 그런데 벌집이 있는 곳은 풍수적으로 수맥이 흐르는 흉지에 해당한다. 땅 속이 습하지 않으면 벌은 살지 못한다. 최근에 벌초를 하다 벌에 쏘여 묵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묘나 그 근처에 벌집이 있다면 일단 흉지로 보면 틀림없다.

     옛 속담에 〈집 안이 쑥대밭이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주택의 마당에 쑥이 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조상의 묘에가 쑥이 자라는 습한 흉지이니 조상의 음덕을 받지 못해 가세가 기울었다라는 풍수적 용어이다. 무덤 속으로 물이 차거나 그 아래로 수맥이 흐르는 경우를 수병(水病)이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육탈이 더디고, 유골은 까맣게 썩는다.

     또 지상의 물이 관중으로 흘러들면 2년 내에 뼈가 녹아 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봉분에 금이 가고 묘가 아래로 가라앉는 경우는 묘 아래로 수맥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땅 속에 수맥이 있다면 그 안의 물은 달의 인력으로 밀물, 썰물이 생기고, 물이 출렁거리면서 흙벽을 치면 지층이 움직인다.

     그 결과 흙을 소복이 쌓아 논 봉분이 갈라진다. 또 수맥에 찬물이 줄어들면, 진공 상태가 됨으로써 그 만큼 채우기 위해 땅 위의 수증기를 잡아당긴다. 그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그 위에 놓인 묘가 땅으로 가라앉는다. 수맥이 지나가면 건물도 금이 가며 유골은 까맣게 그슬려 후손이 편치 못하다. 좌향을 고쳐 잡아 수맥을 비껴 나는 것이 최선이다.

     봉분에 물풀(이끼)나 쑥대 같은 식물이 덮는 경우는 묘 속에 물이 차 있기 때문이다. 광 중에 물 기운이 있으면 흙 속에 포함된 물 기운이 겨울 동안 서릿발로 치면서 흙과 함께 잔디 뿌리까지도 들어올린다. 그리고 들어올려진 뿌리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면 뿌리가 얼어죽는다. 그리고는 봄만 되면 말라죽은 잔디 대신에 이끼나 쑥대가 빼곡이 들어차니, 이끼는 물 기운이 솔솔 올라오는 곳에서만 잘 산다.

     이끼가 군데군데 있고 두께가 얇다면 무덤 속에 물 기운은 적은 것이고, 두터우면서 빼곡하다면 물이 질펀한 곳이다. 재앙이 따르니 이장해야 한다. 봉분의 호석(護石, 둘레석)이 벌어지거나 갈라지는 경우도 묘 속에 물이 차 있기 때문이다. 물은 얼음이 되면 부피가 9%가 늘어난다.

     따라서 광 중의 물 기운이 얼면서 묘의 부피가 커지니 호석의 차 맞춘 부분이 갈라지는 것이다. 묘에 구멍이 뚫었거나 개미· 벌집이 있는 경우는 묘 속이 습하기 때문이다. 개미집 6자 아래에는 우물이 있다고 한다. 구멍은 보통 뱀· 쥐가 들어간 흔적으로 뱀은 피부로 숨을 쉬기 때문에 건조한 곳에서는 살지 못한다. 유골은 검게 썩는다.

[사진 : 용인시에 위치한 유형원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