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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위 벼랑에 제비집 같은 보리암을 매달고 있는 산, 추월산(`12.11,3)

산마루금 2013. 7. 9. 10:40

 

추월산(秋月山, 731.2m)

 

산행일 : ‘12. 11. 3(토)

소재지 :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복리암 마을 입구→복리암 마을→지능선→복리암 정상→수리봉추월산보리암봉보리암추월산 관광단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가을밤 산꼭대기에 보름달이 걸려 좀체 기울어지지 않는다 해서 추월산(秋月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호남(湖南)의 5대 명산(名山 : 사람마다 다르게 꼽고 있음) 중 하나로서 산 전체가 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봉(보리암 정상) 언저리 절벽(絶壁)에는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보리암이 자리 잡고 있고, 봉우리 위로 오르면 추월산의 허리를 돌아가며 펼쳐지는 담양호가 발아래에 환상적(幻想的)으로 펼쳐진다. 또한, 호남의 3대 산성(山城) 중 하나라는 건너편의 금성산성(金城山城)이 잘 조망(眺望}된다.

 

 

산행들머리는 복리암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위치한 ‘숲속의 호수 펜션’

88고속도로 담양 I.C를 빠져나와 29번 국도를 이용 담양읍내(邑內)를 통과한 후, 정읍방향으로 15분 정도를 달리다보면 담양호(湖)국민관광단지가 나온다. 원래 산행을 시작하려고 했던 부리기고개나, 계획변경으로 인해 새로운 산행들머리가 된 복리암 마을 입구는 이곳에서 5분 정도를 더 들어가야 한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29번 국도를 따라 담양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이길을 따라가면 위에서 말한 산행들머리와 국민관광단지를 거쳐 담양에 이르게 된다. 원래는 담양에서 추월산으로 들어오는 것이 옳겠지만, 순창에 위치한 강천산에 먼저 들러 강천산 등반을 원하는 사람들을 내려주고 나서 추월산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실은 강천산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추월산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가는 날이 마침 장날'이라고 오늘이 마침 순창전통고추장 축제(祝祭)가 열리는 날이라고 한다. 축제장으로 가는 차량(車輛)과 강천산으로 단풍놀이 가는 차량들이 뒤엉켜서 도로가 아예 주차장(駐車場)으로 변해버렸다. 강천사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강천산 산행을 원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실고서 추월산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버스가 예고된 산행 들머리인 ‘견양동 마을‘로 들어가는 부리기고개를 지나치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버스는 월계리에 위치한 ’숲속의 호수 펜션‘ 앞에서 멈추고 있다. 이 지점은 ’복리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분명하니 아마 산행코스를 변경하려나 보다. 이곳으로 오면서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산행코스를 단축(短縮)하려는 모양인데, 그럴 경우에는 코스를 변경하기에 앞서 산행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숲속의 호수 펜션’ 오른편으로 난 시멘트포장(鋪裝) 도로를 따라 복리암 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복리암은 사찰(寺刹)이 아닌 감나무와 토종 벌통을 주요 소득원(所得源)으로 삼고 있는 마을의 이름이라고 한다. 도로를 걷다보면 전면에 수리봉의 암릉이 위압적으로 펼쳐진다. 길을 가다보면 왼편이나 오른편으로 갈라지는 길을 두어 번 만나게 되나 무시하고 전면에 보이는 수리봉을 향하여 진행하면 어렵지 않게 복리암 마을에 이를 수가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복리암 마을이 보인다. 마을에 이르기 전에 오른편 밭둑을 지나 곧바로 숲으로 들어설 수도 있으나, 마을을 통과한 후에 산으로 오르는 코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마을을 통과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농가(農家)가 보이고 포장된 길은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비포장 농로(農路)를 따라 얼마간 더 올라간 후, 오른편으로 꺾어 산으로 접어든다. 산길은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거칠기만 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경작지(耕作地)였던 듯, 길가에는 감나무들이 즐비하다. 감나무에 빨갛게 매달린 감에서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다

 

 

 

 

잡목(雜木)과 칡덩굴이 진을 치고 있는 산길이 짧게 끝나면 산길은 이내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 버린다. 비탈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제법 모양새를 갖춘 사면(斜面)길이 나타나고, 곧이어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오른편에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산길이 보인다. 아까 밭두렁을 지나 능선으로 붙었을 경우에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등산로 주변은 굵은 소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이어지는 산행은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가파른 능선을 10분 조금 넘게 치고 오르면 칼로 쪼갠 듯 둘로 갈라진 전망바위 하나가 나온다. 오른쪽 멀리 담양호와 금성산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風景)이 멋지다.

 

 

 

전망바위에서 잠깐 완만(緩慢)하던 산길이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비록 힘이 들지만 그나마 자그마한 위안거리가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오른편의 빈 나뭇가지 사이로 깃대봉의 기암절벽(奇巖絶壁)이 내다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가파른 오르막길은 급하게 오르는 것 보다는 호흡을 조절해가며 쉬엄쉬엄 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깃대봉의 잘생긴 암릉을 구경하면서 쉬엄쉬엄 오르면, 20분 후에는 수리봉의 아랫자락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여 10분 조금 넘게 치고 오르면 주능선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주능선삼거리에는 좀 특이한 이정표(추월산 정상/ 견양동, 천치재/ 복리암 마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어느 부분 하나 돌출된 곳이 없는데도 정상이라는 지명(地名)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복리암 정상’이란 과연 무엇을 뜻일까? 나중에 만나게 되는 ‘보리암 정상’은 산봉우리이기 때문에 정상이란 단어(單語)가 이해가 갔지만, 이곳에서 보는 정상이란 단어는 왠지 낯설기만 하다.

 

 

 

 

 

주능선 삼거리(복리암 정상)에서 수리봉 정상까지는 10분 거리이다. 이곳에서 수리봉을 거쳐 추월산 정상까지는 호남정맥의 마루금을 따라 진행된다. 왼편이 벼랑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깃대봉의 암릉이 멋지게 펼쳐지고 있다. 그 너머에 보이는 산들은 아마 장군봉과 신선봉 등 내장산이 빚어 낸 준봉(峻峰)들일 것이다. 경사(傾斜)가 있는 산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게 된다.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서는 결코 비탈길을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이 사람에게 겸손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샘이다. 아무리 뻣뻣하게 세워왔던 자존심(自尊心)일지라도 자연 앞에서는 당연히 굽힐 수밖에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교육(敎育)방법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정도가 지났다.

 

 

 

수리봉은 독수리를 닮은 형상(形象)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섯 평 정도나 되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수리봉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추월산 1.7Km/ 복흥면 3.5Km/ 사법연수원 2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이정표에 적혀있는 사법연수원은 ‘대법원(大法院) 가인(街人) 연수관(硏修館)’을 말하는데, 가인(街人)은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씨의 호(號)이다. 가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순창 땅에다 연수관을 지었다고 한다.

 

 

 

수리봉의 정상은 사방이 탁 트여서 조망(眺望)이 아주 좋다. 북쪽에는 복리암 마을과 견양동 마을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고, 그 뒤를 바치고 있는 내장산의 장군봉과 연자봉, 신선봉 등이 잘 조망된다. 그 옆에 보이는 산은 아마 백암산과 입암산일 것이다. 강천산과 금성산은 정상에서 추월산 방향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있는 전망바위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금성산은 산성(山城)의 성벽(城壁)까지도 뚜렷하고 그 뒤에 강천산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금성산의 앞에 보이는 호수(湖水)는 물론 담양호이다.

 

 

 

수리봉에서 추월산으로 향하는 길은 맨 먼저 가파른 바윗길과 함께 시작된다. 바윗길의 왼편은 수십 길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졌으나,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담양군청에서 별도의 안전시설(安全施設)을 설치할 필요를 못 느꼈을 정도로 무난하기 때문이다. 그냥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서 내려가면 된다. 바윗길을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면 또 다시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수리봉의 암릉과 그 암릉에 안겨 있는 촛대바위(수리바위)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진행방향에는 물론 담양호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고, 뒤를 받치고 있는 금성산의 산성(山城)이 만들어 내는 곡선(曲線)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수리봉에서 추월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양면성(兩面性)을 띠고 있다. 왼편은 수백 길 높이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진 바위절벽이나, 오른편은 밋밋한 흙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산길도 단애에서 약간 오른편으로 비켜나 있다. 그러나 왼편 바위벼랑에 뿌리를 박고 있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을 구경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진행방향의 왼편 벼랑 아래에는 호수(湖水) 중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다는 담양호반(湖畔)이 줄곧 따라다녀 운치(韻致)를 더한다.

 

 

 

온통 참나무로 이어지는 능선은 한마디 곱다. 비록 왼편이 바위 벼랑이나, 산길은 벼랑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지막한 봉우리 몇 개를 넘게 되지만 고저(高低)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오르내리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을 정도이다. 비석(碑石) 없는 묘(墓)도 지나고, 심심찮게 나타나는 전망대(展望臺)에서 시원스런 조망(眺望)까지 즐기면서 걷는 발걸음을 가볍기까지 하다.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 그리고 길게 펼쳐진 암릉과 절묘(絶妙)하게 어우러지고 있는 산하(山河), 비록 낙엽이 다 져버린 빈 나무로 가득하지만, 이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풍경(風景)인가. 그런 계절을 좋아하기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듬고 싶었는데, 가을은 이미 저만큼 도망가 있다. 능선에 부대끼며 넘어오는 바람결이 스산하기만 한데, 손끝을 간질이는 바람자락은 벌써 시리기만 하다. 며칠 전에 추적이던 가을비에 슬쩍 겨울이 묻어왔던 모양이다. 푸르른 하늘이 깊어도 너무 깊어서 가을이 빠져나갈 수 없기를 바랐는데...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바위봉우리인 720봉를 우회(迂廻)하면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추월산이 내다보이기 시작한다. 수리봉을 출발해서 50분 정도가 지나면 무덤 하나를 지나면서 월계리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이정표 : 월계리 1.1km/ 추월산정상 400m/ 견양동). 월계리 갈림길에서 산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능선 위에 가을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펼쳐진 가을 하늘이 푸르다 못해 시리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저 하늘을 무의미하게 그냥 흘려보내지 말자. 파란 바탕에 뭔가 의미 있는 그림 하나 수놓아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마음 한번 풀어보는 것은 어떨까? 보는 사람마다 당연히 사랑으로 젖어갈 것이고, 사랑에 물든 그들은 틀림없이 행복(幸福)해 질 것이다.

 

 

 

 

월계삼거리에서 10분 정도를 걸으면 호남정맥과 나뉘는 능선분기점 갈림길(이정표 : 보리암 정상 1.2Km, 주차장 2.4Km/ 추월산 정상 0.1Km, 밀재 2.3Km/ 월계리 1.3Km, 견양동 4.2Km)이다. 이곳에서 ‘보리암 상봉’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하고, 추월산 정상은 오른편 호남정맥을 따라서 100m를 더 올라가야 만나게 된다. 추월산 정상은 서너 평이나 됨직한 비좁은 바위 봉우리, 그 흔한 정상표지석 하나 보이지 않고, 그 빈자리를 아랫도리에 ‘추월산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里程標)가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석이 없다고 해서 정상이 아닐 수는 없는가 보다. 정상석 대신 이정표를 배경삼아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주변의 대부분을 잡목(雜木)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호남정맥의 밀재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트이고 있고, 그 왼편은 월산면 들녘이다. 너른 평야(平野)가 반듯하면서도 예쁘장하게 선을 그리며 자릴 잡고 있고, 그 사이사이를 구릉(丘陵) 같은 산들이 헤엄치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폼으로 떠 있다. 숨 가쁘게 올라온 정상, 어렵게 올라온 걸음이니 구태여 서둘러 내려갈 필요는 없다. 배낭을 벗어 놓고 잠깐 쉬었다 가보는 게 어떨까? 물론 벗어 놓은 배낭 위에다 고단한 삶에 찌든 시름 한 조각 얹어 놓고서 말이다. 근심 걱정을 털어내고 바라보는 발아래 세상은 또 다른 세상, 아름다워도 너무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쫒아서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정상에서 삼거리로 되돌아 나온다. 아까 지나왔던 호남정맥의 마루금은 북쪽이고 보리암 가는 길은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보리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곧바로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과 맞닥뜨리게 된다. 비록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금방 완만(緩慢)한 흙길이다.

 

 

보리암 상봉으로 가는 능선은 초반에는 굴곡이 심한 바윗길이지만 이내 부드러운 흙길로 변한다. 부드러운 흙길을 걷다보면 헬기장과 쌍태리 갈림길(이정표 : 보리암 정상 0.9Km/ 쌍태리 1.1Km/ 추월산 0.8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산죽(山竹)으로 둘러싸인 무인(無人)산불감시탑을 지나 암릉으로 올라서면 전망바위 위이다. 북쪽으로는 아까 지나왔던 호남정맥의 마루금이 힘차게 이어지고 있는데, 굽이굽이 이어진 능선엔 바위산의 힘과 흙산의 부드러움이 알맞게 어우러지고 있다. 물론 남쪽도 열리고 있다. 쌍태리와 오성리를 비롯한 마을들, 그리고 월산면의 들녘이 발아래 펼쳐진다.

 

 

 

 

 

 

바위 전망대(展望臺)에서 ‘보리암 정상’은 금방이다. ‘보리암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좁다란 분지(盆地), 이곳도 다른 봉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석 대신에 이정표(거리표시 없이 1등산로, 2등산로, 추월산 정상의 방향만 지시하고 있다)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얼핏 버려진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보리암 정상’은 상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 쓰인 암이라는 글자는 바위봉우리를 뜻하는 바위 암(巖)자가 아니고 사찰을 뜻하는 암(庵)자를 쓰고 있다. 따라서 ‘보리암 정상’이란 보리암 뒷산 꼭대기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정상에서 보리암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내려서야 하지만, 곧바로 진행하는 것보다는 잠깐 오른편에 보이는 전망바위에 올라가 보는 것이 좋다. 시원스럽게 조망(眺望)이 트이는데 그 풍광(風光)이 가히 장관이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열십자 모양으로 유유히 흐르는 담양호(湖)의 끝자락이 내려다보이고, 호수(湖水) 건너편 금성산은 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城壁)과 성루(城樓)까지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호수(湖水)의 기묘(奇妙)한 굴곡(屈曲)과 아기자기한 산등성이의 부드러운 흘러내림이 조화로워 제 아무리 무뚝뚝한 이라도 감탄을 금하기 힘든 광경(光景)이다.

 

 

보리암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2가지이다. 보리암을 경유해서 국민관광단지로 내려가는 1등산로와, 보리암을 들르지 않고 곧장 국민관광단지로 내려갈 수 있는 2등산로이다. 이곳에서는 1등산로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산 거리도 짧을뿐더러, 유서 깊은 보리암(菩提庵)까지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리암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아마 추월산에서 가장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일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진행방향으로는 성벽(城壁)의 윤곽까지 또렷한 금성산과, 그 너머의 강천산이 가깝게 다가오고, 왼편에는 아까 지나온 호남정맥의 마루금, 그리고 오른편에는 신선봉 능선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보리암으로 향하는 긴 나무계단 아래에는 담양호의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보리암으로 내려서는 길은 암릉에다가 무척 가파르기까지 하다. 그러나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위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과 로프 등 안전시설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느끼지 않으니 당연히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진행방향에 아까 보리암 정상에서 보았던 담양호와 금성산, 그리고 강천산이 다시 한 번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10분 남짓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이정표(보리암 0.1Km/ 보리암 정상 0.5Km)에서 철(鐵)다리를 내려갔다가 다시 철사다리를 올라서면 보리암이다.

 

 

 

보리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김덕령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李氏)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碑文)에 따르면 이씨(李氏)부인이 왜적에게 쫓기다가 이곳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였다고 한다. 새운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커다란 순절비 옆에 자그마한 순절비(殉節碑)와 동순지(同殉址) 표지석이 보인다. 정유재란 때 남원이 함락되자 김덕령장군의 부인인 흥양 이씨가 이곳에서 순절하고, 장군의 매부인 창의장 김응회가 그의 모친 성씨와 함께 순절했으며, 또 장군의 처남인 이인경과 이원경의 부인인 광산 김씨와 제주 양씨 동서가 함께 순절했다는 애절한 내용이다. 헌종(1840년) 때 담양부사 조철영이 흥양 이씨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비문(碑文 : 김충장공 덕령부인흥양이씨만력정유매담양추월산왜적순절처 = 金忠壯公 德齡夫人興陽李氏萬曆丁酉罵潭陽秋月山倭賊殉節處)과,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역사적 인물들을 새겨 놓았다는 바위벽이, 순절비의 왼편에 보이지만 이끼에 덮여있는 탓에 판독(判讀)할 수는 없었다.

 

 

법당에 들어가지 전에 약수터에 들러 먼저 물부터 한 모금 마시고 본다. 이곳 보리암의 약수(藥水)가 물맛이 좋기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선입견(先入見) 때문인지는 몰라도 물맛이 시원하면서도 달게 느껴진다. 아니면 하도 물줄기가 약해서 물을 받느라 고생한 탓에 물맛이 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떠오르기에 하는 말이다.

 

 

보리암(菩提庵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은 추월산 상봉 아래의 절벽(絶壁) 끝에 매달려 있어, 옛날에는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암자(庵子)였다고 한다. 고려(高麗)시대 지눌(知訥)스님이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나무로 만들어서 날려 보낸 매가 내려앉은 곳(불좌복전 : 佛座福田)에 창건한 사찰(寺刹)이라는 설화(說話)가 전해져 내려온다. 중창(重創) 및 중건(重建)의 역사가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특기할만한 문화재(文化財)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참고로 그때 지눌이 3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나머지 2마리는 장성 백양사 터와 순천 송광사 터에 내려앉았다고 한다. 보리암은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채가 전부이다. 보리암은 서쪽과 북쪽 뒤를 거대한 암벽(巖壁)이 둘러싸고 있다. 물론 아래 바닥도 암벽(巖壁), 그 위에 평평한 공간을 조성해서 암자(庵子)를 지어 놓았다. 남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위 위에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가지가 두 개로 갈라지고 있는 것이 마치 암자(庵子)를 수호하고 있는 것 같다.

 

 

 

보리암은 절벽에 지지대를 만들고 콘크리트를 채워서 마당으로 조성(造成)한 것이다. 마당 끝 벼랑의 경계는 쇠(鐵)난간이 아닌 대나무 울타리가 대신하고 있어 한결 친근한 생각이 든다. 무채색에 가까운 빛바랜 대나무가 보리암의 오랜 역사를 연상시키게 만드는 것이다. 마당 끝으로 나아가면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조망이 장관이다. 담양호가 발아래 깔려있고, 건너편에 마주보이는 금성산성과 어우러지는 풍광(風光)이 가히 절경(絶境)이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도 암봉 위에 덜렁 얹혀 있었는데, 추월산 보리암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암봉 위에 위태롭게 얹혀야 하는 모양이다. 이왕에 온 명승지(名勝地)이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하지 이유가 없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景觀)을 가슴에 차곡차곡 담고서야 발걸음을 돌린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나오면, 이어지는 하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계속해서 가파른 나무계단들이 줄을 잇는데 가끔 오른편에 너른 마당바위가 보인다. 마당바위에 서면 보리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리암은 산중턱의 바위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마치 절벽(絶壁)에 매달린 제비집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 서있는 곳에서 위에 보이는 보리암까지는 암릉,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선이 거칠어서 도저히 사람이 다닐 수가 없을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 오르내리고 있다. 바위 사이사이로 절묘하게 등산로가 나 있는 것이다. 다시 국민관광단지를 향해 하산을 시작하면 진행방향에 담양호가 펼쳐지는데, 그 푸른 물결이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느낌이다.

 

 

 

 

 

가파른 암릉길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한결 수월하게 하산할 수 있다. 하지만 계단의 경사(傾斜)가 많이 가파르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특히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風景)에 정신을 뺏겨 주의를 산만(散漫)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이다.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길고 긴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이번에는 그다지 험하지 않은 너덜지대로 변한다.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너덜길 가에는 철 지난 단풍나무 몇 그루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 대부분의 활엽수(闊葉樹)들은 잎이 다 져서 빈 나뭇가지만 허공에 걸려있는데, 단풍나무들은 빛이 바래버린 나뭇잎들을 아직도 가지 위에 얹어 놓고 있는 것이다. 추월산 단풍은 단풍 그 자체만으로 보면 사실 인근의 내장산이나 강천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에 어찌 단풍 하나만 넣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주변 풍물(風物)도 함께 넣어야 할 것이다. 추월산의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발아래 펼쳐지는 담양호를 하나의 화폭(畵幅)에 담을 경우 그 아름다움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일대 장관(壯觀)으로 변해 버린다. 여기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환상적인 조망(眺望)까지 곁들이게 되면 오늘 산행은 그야말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보리암을 출발해서 30분 가까이 내려서면 왼편 바위절벽 아래에 커다란 굴이 보인다. 깊이가 5m쯤 되는 굴의 안에는 돌로 제단(祭壇) 비슷하게 쌓아 놓았으나 별다른 의미는 없는 것 같고, 굴의 앞에는 벤치를 만들어 놓았다. 계단을 싫증이 나도록 오래 내려왔으니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고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굴 앞에 세워진 추월산보리암중창공덕비(秋月山菩提庵重創功德碑)의 비문(碑文)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추월산보리암중창공덕비(秋月山菩提庵重創功德碑)에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고려 신종(1198년) 때 지리산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나무로 매(鷹)를 만들어 날리고 그 매가 앉은 자리에 터를 잡고 암자(庵子)를 지었으니 그 이름이 보리암이더라’ 하는 이야기도 새겨져 있다.

 

 

 

석굴에서 너덜길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오면, ‘보리암 정상’에서 보리암을 거치지 않고 곧장 내려오는 2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등산로 주변은 수십 년은 족히 묵음직한 소나무 숲으로 변한다. 피톤치드(phytoncide)가 그득한 소나무향을 맡으며 10분 정도 내려가면 임진왜란 격전지기념비가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이곳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의병진지(義兵陣地)가 포진하고 있었는데, 100여명의 왜병(倭兵)이 기습하여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지휘관 이하 15명의 의병(義兵)이 전사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정유재란 때의 일이었으니 1597년경이었을 것이다. 비문에는 사건 발생일을 1908년11월 25일로 적고 있으나 아마 착오인 모양이다. 어쨌든 나라를 위해 던진 선열들의 장렬한 죽음일진데, 우리가 지녀야할 숙연한 마음을 기껏 날자가 좀 잘못 적혀있다고 해서 어찌 약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산행날머리는 담양호 국민관광단지 주차장

전적비에서 주차장은 금방이다. 울울창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 아래를 잠깐 걸으면 어린이 놀이시설이 보이고, 그 아래가 국민관광단지 주차장이다. 마침 주차장 근처에 순창에 있는 전통고추장 마을에서 밑반찬을 팔러 나온 분이 있어서 깻잎 절임을 조금 구입했다(집에 돌아와 먹어보니 향이 진하고 감칠맛이 있었지만 너무 질긴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추월산 주차장 앞에는 담양호 국민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담양호 위로 나무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건너편 강변을 따라 나무 데크로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금성면(金城面)에 있는 금성산성(山城)과 강천산 강천사(剛泉寺) 등을 아우르는 호반유원지(湖畔遊園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 담양호(潭陽湖), 영산강(榮山江) 유역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4개 댐(長城湖, 光州湖, 羅州湖, 潭陽湖)중의 하나로 1976년에 완공되었다. 제방(堤防) 높이 46m, 길이 316m의 규모에 6,670만 톤의 물을 저장하는데, 이 호수(湖水)의 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담양호의 물이 항상 가득한 것은 이 지역의 지명(地名)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담양이 한자로 못 담(潭)자 쓰듯이 예로부터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강우량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고려 성종 때의 지명도 담주(潭州)였다.

 

출처 : 가을하늘네 뜨락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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